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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적응의 결과

경험이 쌓일수록 검진센터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 행동의 패턴도 여러모로 바뀌었다. 예를 들면… 검진센터 일을 막 시작했을 때, 잘 몰랐을 때는 새로 오시는 수검자가 부담스러웠다. 검진센터를 이용하셨던 분들은 이미 차트가 있으니 전화번호, 주소 정도만 확인하면 되는데 이분들은 시간을 들여 차트를 새로 만들어야 하니까 말이다. 물론 지금은 차트를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용어에 그렇다. 검진센터에서 쓰는 ‘검진’이란 단순한 검사가 아니라 일반검진이나 국가 암검진 덧붙여 기타 자격이나 면허, 채용 등의 특정한 용도를 위한 검진을 말한다. 수검하시는 분들도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신다. 그런데 자기만의 관점에서 필요한 대로 쓰는 분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은 소통이 안 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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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름. 특히 흔한 이름을 가진 분들에 대한 반응도 변했다. 첨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모르니까. 근데 언젠가 부터 영미, 미영, 영숙, 미숙, 영자, 정자 같은 이름(제발 따님 이름 지을 때 고민 좀 더 합시다!)을 들으면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분들은 다시 생년월일이나 주민등록번호로 한 번 더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익숙해진 지금은 상관없다. 이름만 들으면 반사적으로 생년월일을 묻고 검색해서 거꾸로 이름을 찾아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특이한 일이 있었다. 내과의 신환(처음으로 외래진료 오신 분) 두 분의 응급검사가 이어졌는데 공교롭게도 이름도 같았다. 흔한 이름도 아니었는데 차트 번호 끝자리만 다른 것이었다. 병리 샘에게는 특히 더 혼란스러웠고 검사 항목을 몇 번이나 확인하셨다.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네 자리까지 같은 분들은 빼면 이번이 가장 적은 확률의 경우가 아닐까 싶다.

 

이런 그야말로 소소한 거 말고 큰 변화도 있다.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전에는 그냥 머리로만 이해(솔직히 머리로도 이해한 것 같지 않지만)했었는데 이제는 몸소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들. 예를 들면…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거, 또는 암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태도 같은 거 말이다. 이게 꼭 검진센터에서 일한 것의 영향만은 아니더라도 꽤 컸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겠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또 꼭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나와 나의 삶을 대하는 데 더 효과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국내외의 정세, 경제 동향이나 스포츠 경기의 결과, 연예계 스캔들보다는 지금 읽고 있는 책의 다음 쪽이 더 궁금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그나저나 오늘 점심은 뭘 먹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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