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15화 한글로 쓴 외국 이름
오후 근무가 없는 토요일. 퇴근 전에 검체를 처리해야 하는 병리 샘은 벅찰 때가 많다. 할 건 하고 보낼 건 보내야 하니 조금 일찍 검진을 마감한다. 나나 방과 샘도 슬슬 마무리 모드다. 대강 정리하고 오전 내내 참았던 일을 보러 검진센터 바깥,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잠시 뒤 손을 씻고 나오는데 중년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남성분의 숱이 좀 적은, 금발에 가까운 뒤통수와 중년 여성분의 하이힐이 눈에 뜨였다. 느낌이 뭔가 그랬지만 지금은 퇴근 10분 전, 터벅터벅 검진센터로 돌아왔다. 대기실 한쪽에 있는 아레카야자 잎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고 나서 접수대 컴퓨터를 끄려고 마우스를 잡는데 순간 저쪽 채뇨컵을 놓는 틀 옆에 까만 것이 보였다. 분변통이다. 분변통만 두는 파란 바구니도 아니고 이게 왜 여기 있을까? 일단 우리 검진센터에서 드린 통도 아니다. 라벨에 외국 이름이 한글로 세 글자, ○○○이라고 적혀있다. 그게 다다. 얼른 접수 프로그램에 이름을 입력하고 조회를 눌렀지만, 걱정대로 안 나온다. 아차차! 아까 그 숱이 좀 적은 금발 뒤통수. 후다닥 뛰어나갔다. 당연히 아무도 없다. 검진센터가 있는 5층에서 1층까지 서둘러 내려갔다. 역시 없다. 밖으로 나가 사거리와 횡단보도 너머까지 보고 약국도 가보고 주차장에도 갔지만 그런 분은 안 보인다.
한숨을 쉬며 검진센터로 돌아오니 후회와 짜증이 밀려왔다. 병리 샘께 상황을 말씀드렸다. 우선 검체는 냉장 보관하고 월요일에 보내기로 했다. 잠혈 검사 결과를 받아 놓고 나중에 누군가 연락 오면 그때 확인하는 수밖에.
일주일이 넘은 지금 아직 아무런 문의도 없다. 보통 보름 안팎으로 결과를 받아보시니 좀 이르기는 하다. 아, 그리고 바로 그다음 월요일 점심, 길 건너 카페에 점심 겸 커피 겸 갔는데 주문대 앞에 ‘숱이 좀 적은 금발’의 중년 외국 남성분이 서 계셨다. 근처에서 처음 보는 분이다. 우연일까? 여러분이라면? 잠깐 망설였다.
“저… 실례지만… 혹시… ○○○(분변통에 한글로 쓴 그 외국 이름)님…이십니까?”
“아, 아닙니다.”
“아∼, 네, 아이고 죄송합니다, 예∼”
‘그런데 성함이,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는 딱 목구멍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