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69화 물 한 컵
마치 오랫동안 멈춰 두었던 기계를 다시 돌린 것처럼 덜컹거리고 삐걱거리고 괜히 더 분주하다. 단지 월요일인데 말이다. 내과에서는 검사가 계속 올라오고, 채용검진 하러 오시고, 문의 전화는 울리고, 분변을 놓고 그냥 가려 하시고, 소변을 못 받으시고, 전에 검진한 결과지를 다시 받으러 오시고, 부인과 진료를 보러 오시고(한 층 더 위인데)…
그런 와중에 000 님이 오셨다. 요즘 속이 좋지 않아서 위내시경검사를 하고 싶으셨다. 그런데 예약은 안 하셨고 시간표는 꽉 찼고. 당연히 오늘은 낄 틈이 없었다. 예약도 너무 많이 밀려 있다.

일단 12월로 예약을 잡았다. 000 님은 의료급여 대상자시다. 66세가 넘은 의료급여 대상자는 일반검진이 없다. 대신 올해(2018년도)부터 ‘의료급여생애’가 생겼다. 일반검진처럼 키, 몸무게, 허리둘레, 시력, 청력 측정과 일반 문진, 인지기능 문진은 하지만 피검사, 소변검사, 흉부 엑스레이 그리고 혈압 측정이 없다. 피라도 뽑아야 뭐라도 한 것 같을 텐데. 아무튼, 오신 김에 유방암, 자궁경부암 검진이라도 받으시라고 접수를 하기는 했다.
이제 □□□ 님 접수 차례. 예약하신 분이다. 확인 절차를 마치고 소변컵을 드리고는 본격적으로 접수를 한다. 보통 소변을 받아 오시라고 화장실 위치를 알려 드리고 나면 나는 수검자에게 필요한 검진기록지에 이름,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등등 이것저것 써넣기 바쁘다. 게다가 이젠 정신건강, 인지, 생활 습관 같이 추가되는 문진이 많아져서 그 기록지도 챙겨야 하니 화장실에 다녀오셨는데도 접수를 마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접수대에서 5미터 정도 떨어진 정수기 앞에서 소변을 받으러 가셨어야 할 □□□ 님이 물을 마시고 계시는 게 아닌가. 접수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나도 이제 좀 고이기는 했나보다.
물 드시면 안 됩니다!
-(깜짝 놀라심)?!
얼마나 드셨나요?
-한 컵 다 마셨는데.
아~, 그렇게 많이 드시면 안 되는데.
-목이 말라서 마셨어요. 물 먹지 말라는 소리는 없었어요.
예약할 때 꼭 설명해드리거든요.
-금식하라 그랬지 물 마시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그게 한 모금 정도면 모를까 물을 많이 드시면 검사 도중에 위 안에 있던 물이 올라와서 폐로 들어갈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여러 번 하셨는데도요?
-네
(흠)…
덕분에 000 님은 오늘 위내시경 검사를 하셨고 아까 잡았던 12월의 그 날짜는 □□□ 님에게로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