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30화 그만할 권리
연말에는 짜증과 안타까움이 뒤섞일 때가 많다. 이날도 그랬다. 접수가 많이 밀려있을 때였다. 턱! 갑자기 분변통을 꺼내 접수대에 힘껏 내려놓으시고는 한마디 하신다.
-나는 이것만 하면 되는데.
거기(순서표) 성함하고 생년월일 적어주세요. 그리고 기다려주세요. 보시다시피 연말이라 많이 밀려서…
-나는 이것만 하면 된다니까.
그니까요. 앞에 지금 기다리시는 분이 많습니다.
-이것만 하면 되는데 그게 어렵나? 빨리 해주지이.
지금 한 시간 이상 기다리신 분들도 계십니다. 양해해주시고 순서대로 기다려주세요.
-아~이, 나는 시간이 없는데… 빨리 가봐야 되는데…
어쩌라구요? 누구는 시간이 넘치나요?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오후에 병리 선생님이 샘플을 정리하다 보면 접수도 안 하고 그냥 놓고 가신 분변통이 나오기도 한다. 번거롭고 짜증이 나는 일이지만 안타깝지는 않다. 정말 안타까운 건 이런 거다. 연세가 90이 넘는 분이 검진을 받기 위해 오신다. 물론 보호자와 함께.
-올해 안에 받아야 한다는데… 검진을 받으려면 어떡하죠?
지금 위내시경은 예약이 다 차서 여기서는 안 되시는데요. 해당되는 검진을 다 받으시려면 가능한 다른 곳을 이용하셔야 합니다.
-안 받으면 안 되나요?
그게 된다 안 된다 말씀 드릴 수 없는 게 제가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요.
-꼭 받아야 한다는데… 안 받으면 불이익이 생긴다는데…
하아~(한숨), 글쎄요, 그게… 올해 못 받으신 거는 내년에 건강보험공단에 전화하셔서 다시 받게 해달라면 해주거든요. 다시 대상자로 만들어주는 거죠. 그래서 대상자가 되면 그걸 갖고…

밀리는 와중에 설명이 길어지니 기다리시는 분들의 눈치가 보인다.
-근데 이 나이에 꼭 받아야 하나요, 위내시경 같은 거를? 어머님 연세가 90이신데…
아아~~, 그게 제가 의사도 아니고 공단 직원도 아니고…라고는 차마 못 하고 이렇게 대신한다.
의사협회 권고안이란 게 있어요. 위내시경은 74세, 대장내시경은 80세 이상은 권해드리지는 않아요. 검진을 하고 안 하고가 별 차이가 없다네요. 대단한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검진이란 게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 비용을 줄이자는 건데 말이죠. 후우~ 그래서 말씀인데 오늘은 금식하고 오셨으니까 일단 일반 검진은, 그니까 피검사, 소변 검사, 흉부 엑스레이, 키, 몸무게, 시력, 청력, 혈압 재고 뭐 이런 거는 받으시구요. 유방암, 자궁암검진도 그렇고 암검진은 필요하시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내년에라도 공단에 전화하셔서 다시 대상자 만드시고 여유 있게 예약 잡고 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럼 그럴까요?
검진은 몇 살까지 받는 게 정답일까? 놓친 분변잠혈 검사 하나 때문에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언제까지 노심초사 불안해야 하나?
그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