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123화 악필 유감
연말로 갈수록 수검자뿐만 아니라 문의도 많아진다. 내용은 거기서 거기. 검진 대상인가 아닌가, 뭐를 해야 하는가, 그럼 그걸 어떻게 하나…이다. 비슷한 문의가 이어지고 답도 정해져 있으니 같은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게 된다. 때로는 녹음해놓고 재생 단추만 누르고 싶을 정도다.
-어떡해야 해?
혹시 검진 안내서 가져오셨어요?
안내서가 있으면 편하다. 본인 이름으로 받은 건강보험공단의 안내서를 펼쳐서 이건 뭐고 저건 뭐고, 본인부담금이 있고, 없고 등등 거기 쓰여 있는 대로 설명하면, 인쇄의 권위랄까 이해도 빠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이 그냥 입으로만, 말로만 하다 보면 그건 또 왜 그러냐는 질문이 나오기 일쑤고, 내가 줄줄이 읊어대는 내용을 다 알아듣기도 어려워하신다. 나도 그렇다. 내가 잘 모르는 것의 설명을 들으면, 특히 그 내용이 많고 복잡할 때는 그냥 건성으로 ‘네, 네’ 하다가 나중에 다시 묻고는 하니까. 그래서 요즘처럼 바쁘건 말건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시간이 들더라도 또박또박하는 게 낫다. 되묻지 않게 하는 게 결과적으로는 시간이 덜 든다는 사실을 경험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바로 옆에서 기다리시는 두 분도 같이 들으시라고, 직접 글씨를 써가며 일반 검진은 이렇고 구강 검진은 뭐고 암 검진은 저런데… 근데 요걸(일반 검진) 하시려면 공복(공복에다 동그라미)으로 하시면 되고 위암 검진, 내시경(볼펜을 목으로 넘기는 시늉)까지 하시려면 그건 예약하셔야 하는데 많이 밀려 있으니 어쩌고저쩌고… 라고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나 스스로 너무 착한 녀석이라며 다음 분을 접수하려는데.
-내가 좀 알아볼 수 있게 다시 써 줘.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