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악필 유감

연말로 갈수록 수검자뿐만 아니라 문의도 많아진다. 내용은 거기서 거기. 검진 대상인가 아닌가, 뭐를 해야 하는가, 그럼 그걸 어떻게 하나…이다. 비슷한 문의가 이어지고 답도 정해져 있으니 같은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게 된다. 때로는 녹음해놓고 재생 단추만 누르고 싶을 정도다.

 

-어떡해야 해?

혹시 검진 안내서 가져오셨어요?

 

안내서가 있으면 편하다. 본인 이름으로 받은 건강보험공단의 안내서를 펼쳐서 이건 뭐고 저건 뭐고, 본인부담금이 있고, 없고 등등 거기 쓰여 있는 대로 설명하면, 인쇄의 권위랄까 이해도 빠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이 그냥 입으로만, 말로만 하다 보면 그건 또 왜 그러냐는 질문이 나오기 일쑤고, 내가 줄줄이 읊어대는 내용을 다 알아듣기도 어려워하신다. 나도 그렇다. 내가 잘 모르는 것의 설명을 들으면, 특히 그 내용이 많고 복잡할 때는 그냥 건성으로 ‘네, 네’ 하다가 나중에 다시 묻고는 하니까. 그래서 요즘처럼 바쁘건 말건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시간이 들더라도 또박또박하는 게 낫다. 되묻지 않게 하는 게 결과적으로는 시간이 덜 든다는 사실을 경험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바로 옆에서 기다리시는 두 분도 같이 들으시라고, 직접 글씨를 써가며 일반 검진은 이렇고 구강 검진은 뭐고 암 검진은 저런데… 근데 요걸(일반 검진) 하시려면 공복(공복에다 동그라미)으로 하시면 되고 위암 검진, 내시경(볼펜을 목으로 넘기는 시늉)까지 하시려면 그건 예약하셔야 하는데 많이 밀려 있으니 어쩌고저쩌고… 라고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나 스스로 너무 착한 녀석이라며 다음 분을 접수하려는데.

-내가 좀 알아볼 수 있게 다시 써 줘.

(악!)

내게 왜 이런 시련이? 분명 다른 때만큼 자세히, 시간을 들여서 설명했다고 자부할 수 있건만. 순간 내 악필에 대한 원망과 그 악필로 또 글씨를, 그것도 이분이 알아볼 수 있게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밀려왔고, 다시 설명하기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걸릴 시간이 저절로 계산되었으며, 그만큼 늦어질 다음 접수와 그 영향의 직접 이해당사자인 옆에 있는 두 분의 재촉하는 어깨, 그 와중에 이번엔 어떻게 쓰나 보자 은근 기대하는, 내 꺼 포함 여덟 개의 눈동자가 쏠린 나의 삼색 볼펜 끝, 흔들리는 한 획, 한 획에… 삭는다, 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