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64화 깜빡의 흔적
000 님이 손바닥에 볼펜으로 무언가를 적고 계셨다.
메모지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요. 다 썼어요. 내가 깜빡깜빡해서 그냥 숫자(사물함 번호)만 기억할라고.
아, 네에~.
‘수면이요’하는 내과 샘의 호출에 검진센터에서 가장 오래된 나의 역할인 ‘수면내시경 보조’를 하러 내시경실로 들어갔다. 수면제가 주사 되고 나는 000 님의 두 손을 잡다가 손목에서 사물함 열쇠를 발견했다. 까맣고 조금 굵고 탄력 있는 머리 고무줄을 열쇠 구멍에 끼워 손목에 차고 계신 것이다. 아하, 이렇게 하실 수도 있구나, 안 잊어버리고 괜찮은데!
위내시경 검사를 하는 분에게는 가방이나 겉옷, 소지품 등을 사물함에 넣고 신발을 실내화로 갈아 신으시라고 안내한다. 사물함에는 1번에서 10번까지 번호가 있고 칸마다 다른 열쇠가 꽂혀있다. 얼마 전에 방사선사 샘이 의료용 하얀 밴드를 이용해서 유성펜으로 번호를 적어 열쇠에 붙여 놓았지만 지워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해서 지금은 번호가 보이지 않는 열쇠들이 있다. 그래도 직원으로서 나는 별다른 불편이 없다. 사물함이 10개뿐이고 또 다 잠겨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빈 곳에 찔러 넣어 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안 열리면 옆 칸으로. 그래도 이용하는 입장에서는 본인이 몇 번 사물함에 넣었는지 곧잘 잊어버리시나 보다. 게다가 열쇠에 번호도 없으니.
특히 전에 일반내시경을 할 때 구역질을 너무 심하게 하셔서 원장님이 다음엔 수면으로 하시라고, 그래서 이번에 처음으로 수면내시경을 하시는 000 님은 평소에도 잘 잊어버리는데 수면까지 하니 사물함 번호가 생각나지 않을까 더욱 걱정이 되셨나 보다. 해서 손바닥에 번호를 적고 계셨던 것이다.
다음날, 머리 고무줄이 있는 열쇠가 사물함에 딱, 꽂혀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흠…
전엔 잘 몰랐다가 검진센터에서 일하면서 인식하게 된 것 중에 하나가 옷의 주머니 문제다. 대체로 남성복에 비해 여성복은 주머니가 작고 아예 없는 경우도 많다. 불편할 텐데 라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핸드백을 들고 다니시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여성복에도 주머니를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