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58화 자세의 진화
검진센터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로 업무가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나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수면내시경 보조’이다. 초보일 때야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으니 보통 출근하자마자 예약 일정을 확인하고 수면이 언제 있는지, 몇 명인지 등을 파악하고 수첩에 적고 기억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다른 일을 하다가 ‘수면이요’, ‘잡아주세요’ 등등 내과 샘의 신호를 받으면 내시경실로 가면 그만이다. 그만큼 나의 ‘수면내시경 보조’가 그 어떤 경지에 올랐달까?
이렇게 어떠한 돌발 상황이라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경이적인 자세가 완성되었다. 내가 봐도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세상에 정답이 없듯이 이 완벽한 자세에도 허점이 있었으니.
이 자세로도 제어가 안 되는 수검자가 일 년에 한두 명은 꼭 있다. 처음에는 이런 분을 만나면 내가 왜 무너졌을까, 허점이 무얼까, 근력을 키워야 한다는 둥 내 안에서만 문제를 찾기 일쑤였다. 하지만 어느 날 깨달았다. 세상에는 내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게 있다는, 내가 아무리 뭔 짓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해서 이제는 겸허하게 받아들일 뿐 자책하지 않는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나저나 참 무더운 여름이다. 그래도 병원이 젤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