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55화 가끔 오바(over)도 하고
지금 현재 드시는 약은? 예를 들어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그러니까 그게 전에…
바로 지금, 이 순간, 결단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판단을 해야 한다. 말을 끊을 것이냐 계속 들을 것이냐. 대부분은 당연히 수검자가 기분 나쁘시지 않도록 말을 끊는다. 왜냐면 이런 식으로 계속 들었다가는 이 많은 문진표를 작성하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아~네, 일시적으로 치료하신 거 말고 지금 현재 계속 드시는 약이요?
-고혈압하고 그 뭐냐 코…
콜레스테롤, 고지혈약이요?
-그려 그거하고 당약.
네에, 혈압, 고지혈, 당뇨!
-근데 당약은 끊었어.
‘네, 당뇨약은 끊으셨고’ 하고 다음 문진, 가족력으로 넘어갔다, 평소라면. 갑자기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가끔 그런다. 차례를 기다리시는 다음 수검자도 없고 예약하신 분도 오지 않으시고 해서 그냥 듣기로 방향을 틀었다. 셀프처방을 하신 이유가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고 또 낯이 익은 분이기도 해서.
왜요?
-너무 기운이 없어서. 내가 그냥 끊어 버렸어.
의사 처방도 없이요?
-저기 00의원에 당약을 타 먹었는데 약 받으러 가서 검사 하니까 101이 나오는 거야. 그리고 기운이 너무 없어서 약을 안 먹으면 안 되겠냐 그러니까 3일 뒤에 다시 보자는 거지. 그래서 다시 가서 검사를 하니까 115가 나오더라고.
밥을 먹고 가셨는데?
-그렇지.
괜찮네요.
-그런데 또 며칠 뒤에 가니까는 181이 나오더라고.
높네요?
-근데 그냥 끊었어.
맘대로요?
-(안 들으심) 끊고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 기운이 나. 입맛은 아직 안 돌아 왔고.
그래서 그냥 안 드신다? 검진 결과에 공복 혈당 검사가 있으니까 나중에 결과 받아보시면 꼭 확인해 보세요. 혹시 궁금하시면 전화를 하시거나 내과로 오시구요.
어차피 안 들으시겠지만 그렇게 부연 설명도 드리고 두런두런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면서 잘 안 들리신다던 귀, 청력검사도 하고
다 잘 들리시는구만요.
시력도 재고
저보다 좋으신데, 뭘요.
그렇게 모처럼 알차게 살아오신 인생과 가족사도 듣고야 말았다. 그런데 문진표 작성을 다 도와드리고 돌아와 접수대에 앉으니 당뇨약을 끊은 얘기 말고는 전에도 다 들었던 말씀 같다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