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이런 날도

내가 일하고 있는 검진센터는 8시 30분에 검진을 시작한다…고 되어 있지만 대개 10분 정도 일찍 문을 열고 준비를 한다. 그런데 문을 열기도 전에 검진센터 앞 복도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수검자를 만날 때가 종종 있다. 가끔 대여섯 분이 기다리시기도 하는 데 그럴 때면 가슴이 콱 막힌다. 성격 탓이겠다. 오늘은 두 분이 기다리고 계신다. 보안을 풀고 문을 연다. 들어와서 기다리시라고 말씀드리고 늘 하던 일을 시작한다. 먼저 불을 켠다. 접수대 컴퓨터 전원을 켠다. 동선에 따라 차례대로 병리실, 방사선실의 컴퓨터와 기기들의 전원을 넣는다. 그리고 내시경실을 지나 복도로 나가 에어컨을 켜고 돌아와서 다시 내시경실을 통해 초음파 검사실로 간다. 컴퓨터과 초음파검사기를 켠다. 내시경실의 컴퓨터과 내시경 장비는 내과 샘이 올라와서 관리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지나간다. 검진센터 안을 한 바퀴를 돌아 접수대로 오기 전에 혈압계, 키, 체중계, 청력검사기 역시 켠다.

 

접수대에 앉아 프로그램을 연다. 공단에도 접속한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 사이 병리사 샘, 방사선사 샘이 오신다. 물론 이분들이 나보다 먼저 오실 때도 많다.) 먼저 예약자가 오셨는지 확인하고 순서대로 접수한다. 아까 일찍 오신 두 분은 8시 40분과 9시에 검진 예약을 하신 부부시다. 신원과 오늘 하실 검진 항목을 확인, 안내하고 소변 검사를 위한 일회용 종이컵을 드린다. 일반검진만 하시는 직장가입자도 오신다. 역시 접수하고 소변컵을 드리려는데 분변도 받아 오셨단다. 다만 분변잠혈 검사를 위한 통에 담아 오신 것이 아니라서 옮겨 담을 분변통을 따로 드린다. 일반검진과 위암 검진을 다른 곳에서 하시고 유방암 자궁암 검진만 받으러 오신 분도 검진 조회를 하고 접수를 한다. 중간중간 내과나 부인과에서 외래 검사도 온다.

차례에 따라 신체 계측을 하고 피검사를 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순서가 얽히거나 중간에 다른 검사가 들어와서 대기시간이 길어질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유연하게 검사 순서를 바꿔 다른 검사를 먼저 받도록 안내해서 대기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인다.

이제 한 분씩 한 분씩 검진이 끝나간다. 검진이 끝나면 다시 한번 검진 항목을 다 받으셨는지 확인하고 검진기록표를 드린 다음 내과로 안내한다. 중간에 추가 검사를 원하시는 분도 있었고 당연히 문의 전화도 여러 번 왔지만, 딱히 막힘없이 일과가 진행되었다. 틈이 나면 전날 있었던 검진의 문진표도 정리하고 판정을 받을 것은 내과로 내리고 또 다 된 것은 출력하여 점심시간을 이용해 가까운 우체국에서 발송하기도 한다.

이렇게 오늘은 무리 없이 일과가 흘러간다.

 

그제처럼 갑자기 엑스레이 촬영기의 배터리가 고장 나서, 진상 수검자가 나타나서는, 술을 드시고 오셔서는, 문진표가 사라져서, 예약 날짜를 착각하시고 오셔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은 참 평온한 날이다. ‘검진실 블루스’에 쓸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 날, 이런 날도 있는 게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고맙기도 하다. 한국 의료의 구조적인 문제를 떠나서 의사, 간호사가 폭행당하고 응급구조대원이 얻어맞으며 진상 환자가 난동을 부리는 일이 터무니없이 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