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87화 물증
-내가 내일로 예약했는데. 평소에 변 보기가 어려워서 오늘 본 김에 받아가지고 왔어.
아, 네. 그럼 오신 김에 오늘 유방암, 자궁암 검사도 하시겠어요?
-아니, 다른 거는 내일 할라고.
어제의 일이다. 그래 맞다. 어제 내가 그랬다. 분명하게 기억한다. 다만 ‘어제의 나’는 내일 예약자 명단, 즉 오늘 예약자 명단을 몰랐으므로 당연히 예약하신 분이겠거니 생각하고 내일, 그러니까 오늘 오시라고 한 거다. 그런데 지금, 어제의 내일인 오늘, 접수하려고 보니 눈앞에 있는 예약자 명단에 000 님은 없다. 어찌 된 일인가?
-어제 내가 오늘 오겠다고 했잖어.
그러시기는 했지요. 제가 접수했잖아요. 근데, 여기 예약 명단에 없어요. 보세요. 예약하신 날짜가 오늘 맞나요?
-(네가) 오늘 오라고 그랬잖어.
그랬지요. 근데 언제 예약하셨어요?
-오늘이여.
아니, 검진하기로 한 날 말고 그 예약을 언제 잡으셨냐 구요?
-오늘로 잡았지.
그 말이 아니고, 예약을 어디서 하셨냐고, 여기서? 혹시 제가 잡아드렸나요?
-아니, 그 여자가 했는데. 그이는 어디 갔대? 안 나왔어?
잠깐만요. 여기 앉아있던 여선생님한테 예약하셨어요? 오셔서?
-아니 여기가 아니고, 아래(3층 내과)에서.
언제 잡으셨는데요?
-오늘로 잡았다니까.
아니, 예약날짜 말고. 3층에 오신 게, 그 변통 받으신 게 언제냐구요?
-그저껜가? 그때 받아가고. 어제 가져왔잖아. 내가 변을 자주 못 봐. 그래서 어제 봤을 때 가져온 거지.
네, 맞아요. 근데 그때는 오늘로 예약하실 수가 없어요. 꽉 차 있어서. 혹시 예약지, 그니까 예약한 날 날짜하고 시간 써서 드린 거 가지고 계세요?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