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77화 인상 보다 동병
연말이라 일찍 나와서 검진준비를 마쳤건만 오늘따라 예약하신 분들마저 안 오신다. 기온이 뚝 떨어져서 그런가? 기대와 긴장감이 섞인 침묵의 시간…을 깨고 드디어 오셨다. 낯익은 분이다. 여기서 낯이 익다는 건 둘 중에 하나. 긍정적 아니면 부정적 각인. 하필 이분은 부정적인 느낌이다. 전에 나랑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왜 부정적인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지? 등등 차트와 검진조회 창을 여는 순간에도 쉬지 않고 잔머리를 굴려본다. 진상 수검자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딱 필요한 만큼만 응대하고 가능한 빨리 보내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정신이 남아나질 않는다. 그런데 이분의 차트에는 별다른 내용도 없다. 흠, 혹시 모르니 일단 경계에서 방어모드로 바꾸고, 오늘은 일반검진만 하신다기에 그것만 접수하고 소변컵을 드리면서 그래도 말씀을 더 드렸다.
여기는 예약이 (12월 말까지) 꽉 차서 안 되는데 올해 위암검진, 분변잠혈검사도 해당되시거든요. 그래서 위내시경을 하시려면…
-아, 그거. 실은 내가 작년 말에 여기서 초음파를 했는데, 그때 원장님이 췌장 쪽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진료의뢰서를 써주셔서, 그래 그거 가지고 (큰 병원)가서 검사해서 암이 나와 가지고, 허허. 지금 잘 치료받고 있어요. 거기서 계속 엠알아이, 씨티 찍고 그러고 또 얼마 전에는 내시경이고 뭐고 다하기도 해서…
이 대목에서 울컥! 내가 항암을 한 뒤로는 암 투병 얘기만 들으면 감정이입이 너무 잘 된다.
아아! 저도 지난해에 암이어서…
-어디?
저는 여기가. 그래도 이제 저는 항암은 끝내고 지금은 그냥 3개월마다 경과를 보고 있어요. 근데 건강해 보이시는데 지금도 계속 치료 중이신 거예요? 수술은…?
-위치가 애매해서, 허허, 수술은 안 되고. 그 뭐야 방사선 치료는 끝났고 요즘엔 항암치료만 가서 받아요. 주기적으로 한 번씩.
메스껍거나 뭐 다른 부작용은 없으세요? 음식도 잘 드시고?
-예, 별다른 건 없어요. 마지막으로 검사했을 때 크기도 줄었다고 하고.
와, 정말 다행이네요. 하하.
-예, 하하.
검진을 마치고 문진을 위해 내과에 내려가실 차례.
그럼, 안녕히 가세요. 치료 잘 받으시고 꼭 회복하시구요, 헤헤.
-예, 고마워요. 잘 계시고. 하하
역시나 인상이나 느낌만으로 판단해서는 아니 되겠다. 오늘도 바쁘겠지만 기분 좋은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