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76화 오작동
수검자로 북적이는 시간, 검진 순서지에 적힌 다음 차례는 이제 박영래(가명)님. 흔한 이름이 아니어서 호명하고 접수하기 전에 먼저 차트를 열어보았다. 역시 한 분뿐이다. 주저 없이 검진 조회를 한다. 이미 수검 완료. 다른 곳에서 올 3월에 이미 검진을 다 하셨다. 앗싸~! 일이 줄었다. 접수할 필요 없이 상황 설명만 드리고 가시면 되니까 말이다.
박영래님?
-네에.
박영래님은 검진을 이미 다 하셨네요. 3월에.
-안 했는데요.
00 의원에서 하셨다고 나오는데?
-안 했어요. 거기 가본 적이 없는데.
혹시 회사에서 단체로 검진하신 건 아닌가요?
-아니요. 안 했는데…
어라? 뭔가 이상하다. 생년월일을 확인해 보니… 허걱, 다른 분이다. ‘박영래’가 아니라 ‘박영대’님이다. 다시 순서지를 보니 ‘래’가 아니라 ‘대’자! 조금만 우기면 ‘래’자라고도 할 수도 있는 그런 ‘대’자이기는 하지만. 순간 모골이 송연, 식은땀이 주르륵 정도는 아니어도 어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충분했다. 만약 그 ‘박영래’님이 검진을 하지 않으셔서 검진 조회 창에 빈칸이 보였다면? 엉뚱한 분을 접수하고 엉뚱한 분에게 검진결과를 보내고 엉뚱한 검진을 청구하고… 으악,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붐비는 연말을 피하시고 3월에 일찌감치 검진을 마치신 그 ‘박영래’님께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드리며 늘 건강, 건승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오작동. 주로 기계나 전자 제품, 무슨 장치 같은 것에 쓰는 말일 텐데 인간인 나도 가끔 잘못 작동하는 것 같다. 자주는 아니어도 깜빡깜빡 한지는 이미 꽤 되어서 그러려니 한다. 단순히 나이가 들면서 생긴, 그러니까 오래 써먹어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삐걱거림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항암 이후 이른바 리셋 과정에서 뭔가 잘못 조합되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연말인데,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 글을 읽어보시는 모든 분과 더불어 큰일 없이, 한 해를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갈수록 추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