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44화 세 친구
세 분이 함께 오셨다. 친구 사이 같다. 위내시경 검사는 예약을 하셔야 해서 지금 받기는 어렵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세 분 모두 작년에 받았다고 오늘은 받을 수 있는 것만 받고 가겠다고 하신다. 조회를 해보니 두 분은 올해가 검진 연도가 맞지만 다른 한 분은 분변잠혈 검사만 해당할 뿐 다른 검진은 대상이 아니었다. 고무줄 호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출생년도가 다르신 거다. 대상자, 대상 항목은 공단에서 정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드렸지만 왜 당신은 해당이 안 되냐고 서운해 하시는 눈치다. 그렇게 접수를 하고 이것저것 검진을 하고 가셨다.

이분들이 어려서부터 친구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 하고 계신 차림새나 분위기로 보면 아주 비슷하다. 걷기 편한 신발, 짙은 색의 주름 잡힌 바지, 외투, 한쪽으로 멘 작은 가방, 파마한 머리. 보통의 할머니 하면 생각나는 전형적인 차림새이기도 하지만 세 분이 가방을 멘 방향까지 같다 보니 친구는 친구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문득 어제 내시경 검사를 하고 가셨던 젊은 세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친구끼리 오시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드문 편이고 한 사람이 내시경을 한다고 친구가 둘씩이나 함께 따라오는 것은 더 드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용하는 분이 대부분 40세 이상인 평소에 비교해서 유난히 웃음소리가 크고 끊이지가 않았던 어제였다. 30대 초반이고 그중 한 분은 임신 중이었던 세 친구.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다는 얘기가 딱 들어맞는 분들이었다.

혹시 어제 온 젊은 세 분의 40년 뒤가 오늘 오셨던 세 분의 모습일까? 아니면 오늘 오신 세 분의 40여 년 전 모습이 어제 오신 세 친구이었을까?
머릿속에서 나 혼자, 내 맘대로, 아무렇게나 시간 여행을 한다. 아니지, 어쩌면 이분들이 진짜 시간여행을 했을지도…
아무도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가는 것은 원하지는 않으시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