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98화 별거 아닌데 꼭 필요한
검진센터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소소한 물건이 몇 가지 있다. 주사기 같이 주로 병의원에서만 쓰는, 그런 것 말고 어디에나 있기는 다 있고 누구나 쓰기도 다 쓰지만, 그렇다고 꼭 그렇게 많이 이용하지는 않는 그저 그건 거 말이다.
먼저 클립.
여기처럼 클립을 유용하게 쓰는 곳은 못 본 것 같다. 검진센터의 일이 익숙해질 무렵부터, 아니 내가 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일관되게, 엄청 많이, 자주 사용한다. 용도는 검진기록지 뭉치를 임시 고정하는 것이다. ‘엘티이’를 넘어 ‘빠이브지’시대로 가는데 아직도 웬 ‘종이’냐고 하시겠지만, 검진센터에서는 여전히 종이가 먼저다. 일단 원본을 5년 동안 보관해야 한다. 혈액검사 결과, 엑스레이 판독 결과, 자궁경부암과 분변잠혈 검사의 결과지까지 나올 때마다 첨부해야 하는데 클립 사이로 끼워 넣으면 그만이다. 최종 판독, 판정이 끝나고 컴퓨터에 입력하고 뽑아 발송하고 나서 스테이플러로 고정할 때까지 쭉 사용한다.
두 번째, 우표.
지금 이글을 보시는 독자께서는 마지막으로 ‘우표’를 이용해보신 게 언제인가? 나는 어제도 우표를 붙였다. 왜 ‘요금 별납’을 이용하지 않고? 결과 통보서는 적게는 한 장, 많으면 아홉, 열 장까지 차이가 난다. 가령 자궁암 검진만 하셨다면 당연히 한 장의 결과지면 된다. 그런데 일반검진과 모든 암 검진을 다하고 생활습관, 비만 처방이 들어가고 거기에 인지장애, 우울증이 의심되어 그 해설까지 첨부되면 무려 10장이 넘는다. 이런 것을 매번 우체국에 가서 일일이 무게를 재고 따로 결제하면 그게 더 번거롭다. 그래서 3장까지는 380원, 4장부터는 400원에 맞추어 우표를 붙여 발송하는 게 편하다. 참고로 9장부터는 50g이 훌쩍 넘어가서 결과 통보서 한 통의 일반우편 발송비가, 즉 우표를 590원어치 붙여야… 한다는…. 어라?! 이 대목에 잠깐! 우표를 사고 나눠서 또 붙이는 시간을 생각하면? ‘번거롭게’ 우체국에 가는 게 덜 번거롭겠는데. 이런!
세 번째, 수정테이프, 일명 화이트!
수기가 필요한 문서를 다루는 일은 자기가 쓴 것도 못 알아볼 정도로 글씨가 엉망인 나로서는 솔직히 끔찍한 일이다. 그런 내가 접수할 때마다 이름과 차트 번호, 날짜,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직장과 지역가입자 구분, 통보처, 본인부담금 여부 등을 써넣어야 한다. 당연히 오자가 나오고 그럼 수정테이프. 혈액 검사 결과를 옮겨 적다가 틀리면 수정테이프, 불러주신 주소를 바꾸고 싶다고 하시면 수정테이프, 내 마음의 상처도 지워버리고 싶다면 수정테이프…같은 구닥다리 말장난은 집어치우고 아무튼 많이 쓴다.
단순하고 특별할 것 없는 것들이다. 비싸거나 귀한 건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검진센터의 나는 매일 써야 하는 것이고 심지어 없으면 불안하기도 하다. 요즘에는 정치, 경제, 사회 같은 큰일에는 무덤덤하고 오히려 소소한 일에 예민해졌다. 갱년기 때문인지 항암의 후유증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어제는 우표 때문에, 오늘은 뜯은 지 얼마 안 된 수정테이프가 망가지는 바람에 짜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