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127화 철없는 남편?
올해 80세이신 000 님의 넥타이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풀 수만 있다면 풀어드리고 싶었고 그래서인지 무의식적으로다가 다음과 같은 대사가 튀어나와 버렸다.
넥타이를 매고 오셨네요? (검진하러 오시면서 편하게 입고 오시지 왜?)
-(눈웃음) 씨익!
-농사 질 할 때도 넥타이를 매는 이여. 이 인간이! 겉멋만 들어가지고…
-아이, 뭘 그런 소릴 하고 그랴… (들릴까 말까 작은 목소리)
요즘 일없으시면서… 집에서는 편하게 입고 계실 거잖아요?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와. 하루 죙일 돌아댕기다가…
코로나 땜에 안 돌아 다니신다면서…?
-이거이거 하다가 온다니까. (화투 섞는 시늉)
-지금 물 마시면 안 되지?
지금은 드시…
-검진하는데 왜 물을 마셔!
그렇게 잔소리랄까 핀잔이랄까 화풀이랄까? 딱 꼬집어 하나가 아닌, 그런 감정이 모두 섞여 있는 대사를 검진 내내 치셨다. 그걸 그냥 슬슬 피하며 웃어넘기시는 000 님이나 병리실이면 병리실, 엑스레이실이면 엑스레이실 앞까지 계속 쫓아다니시면서 ‘잘 좀 해!’, ‘똑바로 해!’ 거의 추임새처럼 넣으시는 부인이나 두 분 다 참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시경 검사가 끝나고 나오셨을 때,
이제 물드셔도 되요. (000 님은 소파에 앉으시고 부인은 가방에서 뭘 꺼내시려는데 잘 안 나오는 듯)
아니, 그냥 저기(정수기) 물드시면 되는데…
엥? 종이팩 오렌지 주스에 빨대까지 꽂아주시는 게 아닌가?
에이 다해주시네~. (어차피 다해주실 거면서 왜 그렇게 면박을?)
-근데 빠마 머리는? 짧게 자르니까 딴 사람 같애.
급화제를 바꾸시고는 내가 답할 마땅한 대사를 찾기도 전에 부랴부랴 가셨다. 아 참, 저는 빠마가 아니고 반곱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