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114화 파도
내가 검진센터에서 일하면서 기대하는 이상적인 상황은?
-수검자가 한 번에 한 분씩 오신다.
-예약하신 분은 제시간에 오시고 제시간에 마친다.
-검진 장비가 말썽 없이 잘 돌아간다.
-청구할 때 오류가 없다.
자잘한 것들까지 집어넣으면 훨씬 더 많겠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매우 안정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답은 정해져 있다. 일 년 중에 이런 날이 별로 없는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업무를 시작하고 나서 40분 정도는 뭔 일이 났나 싶을 정도도 적막이 흘렀다. 경험상 시작이 이러면 뭔 일이 나게 되어 있다는 불길한 예감. 그 예감이 한 번쯤은 틀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 그런 얄팍한 생각으로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수검자가 한꺼번에 오셨다. 예약하신 분들도 하필 빠듯하게 오신다. 예약하실 때는 말씀하지 않았던 검사를 추가로 원하신다. 그만큼 검진 시간이 길어진다. 그 사이를 외래 검사가 파고든다. 드디어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제 밀리기 시작한다. 기다리는 시간이 쌓인다. 대기실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마침내 때가 되었다. 어김없이 터진다.
-아니 내 검사는 언제 해요?
어찌어찌해서 조금씩 밀리다 보니…
-그럴 꺼면 뭐 하러 예약을 잡아요?
죄송합니다. 정 시간이 안 되시면 다시 잡아…
-어떻게 낸 시간인데 또 오라고?
죄송합니다. 최대한 서두르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언제 되는데요?
그제도 어제도 그랬다. 몰릴 때 몰리고 없을 때는 없는 공식.
하지만 압력밥솥에서 스팀이 빠지듯이 틈은 있기 마련이고 그래서 버틸 수 있다. 요즘에는 지역 지사, 보건소의 홍보나 수검자의 학습효과 때문인지 연말에 몰리던 수검자가 조금은 더 분산되는 것 같다. 오늘 검진 장비는 말썽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 열흘에 한 번꼴로 하니까 오늘은 청구를 안 해도 된다.
고요, 물결, 파도, 큰 파도, 더 큰 파도… 해일. 그리고 다시 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