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28화 아~악, 12월
어제 월요일은 올해, 아니 요 몇 년을 통틀어 나에게 가장 바빴던 하루였다고 단언할 수 있겠다. 함께 일하는 두 분 선생님이나 원장님이 11월, 12월에는 무척 바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정말이지 이럴 줄은 몰랐다. 문 여는 시간부터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한 수검자는 거의 12시가 되어서야 썰물이 빠지듯 소리 없이 줄어들었다. 특히 절정에 이른 그러니까 8시 반부터 11시까지 두 시간이 좀 넘는 동안은 잠깐의 틈은 고사하고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수검자가 몰릴수록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실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날짜를 빼먹는 건 일도 아니었다. 주민번호를 누락하고 소변을 받는 종이컵을 드리지 않거나 오더도 엉뚱하게 넣었다. 실수가 반복되니 더 굳어지고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렇게 접수 자체가 느리다 보니 내가 접수대에 있는 동안 검진은 더욱 느려졌다. 그렇다고 모든 것은 박 샘이나 문 샘에게 맡길 수도 없다. 이분들은 피를 뽑거나 엑스레이를 찍어야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해야 되는 일이니 하기는 하지만 내가 워낙 느리니 원. 답답하신지 대신 접수를 하신다. 그럼 그만큼 또 다른 일이 밀린다. 난감하다. 어쩌다가 ‘수면이오’ 소리를 듣고 내시경실로 뛰어 들어가야 한숨 돌릴 정도니 할 말을 다했다. 그런 오전을 겪고 나니 오후에는 그저 멍하니 멀미를 가라앉히기 급급하다.

왜 제일 바쁜 12월에 오시는 걸까? 고민을 해봤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은행에 매달 말일 젤 바쁜 시간에 간 적이 많고 제일 바쁜 시간에 전철을 탄 적도 많으며 제일 붐비는 점심시간에 식당에 갔었다. 아! 검진 받는 분들께 바쁜 시간을 피해달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다.
일의 성격이 달라서 내가 해왔던 만화작업과 비교하기는 뭐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바쁘게 정신없이 작업을 했었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마감에 쫓겨 세상이 망했으면 했던 적은 꽤 있었다. 아무튼 나는 요즘 가장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