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72화 사무장병원
연말로 갈수록 검진이 밀려드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외래 내시경 검사가 있다. 급하거나 꼭 필요해서 원장님이 오더를 낸 것이다. 000 님이 그런 경우다. 000 님은 다른 병원에서 받은 처방전을 가져오셔서는 그대로 약을 달라고 하셨단다. 약이 꽤 많았는데 그것도 몇 달 치를 원하셨다. 한 성격하시는 원장님이 그대로 처방할 리는 없고.
예? 이걸 다요? 저는 이렇게 약 못 드려요. 똑같이 약을 받으시려면 정말 이만큼 아픈지 확인해 봐야겠어요.
이렇게 해서 000 님은 내시경검사실이 있는 검진센터로 오셨다. 곱상하시고 얼굴에 주름도 없으셔서 제 나이로 보이지 않는 분이었다. 보호자인 남편과 함께 오셨는데 나이 차가 많아 보였다. 뭐랄까 너무 다정다감하셔서 부부가 아니라 연인 사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나의 편견이다. 아무튼, 내시경검사 결과는 경미한 위염이었다. 원장님은 내시경을 하는 동안 보호자에게 계속 설명해드렸다. 그리고 끝으로 덧붙였다.
큰 이상이 없으신데요, 뭘! 이 정도로는 그렇게 많은 약을 드실 필요가 없어요.
원장님은 약을 2종으로, 기간도 엄청 줄인 처방을 냈다. 보호자는 큰 이상이 없다는 말에 기분이 좋으셨는지 000 님에게 계속 이상 없다고 말씀하신다. 내시경 검사를 하는 내내 두 분 다 들으셨는데도 말이다.

마침 사무장병원에 대한 기사가 눈에 띈다. 불법 사무장병원으로 의심되는 요양병원, 의료생협 등 90곳이 적발되었고 5천8백억에 달하는 부당이득금을 환수한다는 내용이다. 000 님이 가져오신 처방전은 0000 의원에서 낸 것이다. 이름만 들으면 꼭 서울의 큰 병원 같은 곳으로 이 지역의 병원 관계자들, 그러니까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사무장병원(2018년 현재, 폐업)이었다. 거기서 무려 7가지의 약을 넉 달 치나 받으신 거다.
사무장병원은 검사나 처방전을 남발한다. 왜? 돈 벌려고! 골목식당도, 병원도 돈을 벌어야 한다. 못 벌면 망하니까. 사무장병원의 폐해는 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돈만 바라기 때문에, 돈이 목적이기 때문에, 정작 의료는 뒷전이기 때문에,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용자의 몫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긴데, 누구나 다 아는 초대형병원에는, 규모도 크고 시설 좋고 실력 있는 의료진도 많을 텐데 왜 그런 곳에 중증외상센터가 없을까 궁금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알 거 같다. 그러고 보면 전에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에서 병원 이사장(의사 아님)이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내질러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긴 내 병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