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75화 드링크 한 박스
연말로 갈수록 수검자가 늘어나고 그만큼 정리할 것도 많아진다. 검진의 파도가 몇 차례 지나가고 이제 수검자가 뜸한 시간. 이런 틈을 타 얼른 잡무를 처리한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는데도 어째 끝날 기미가 안 보여서 조금 더 서둘렀다. 바로 그때 000 님이 오셨다. 함께 정리하고 있던 권 샘이 낯이 익은 분 같다는, 다 들리는 독백을 날렸다. 나는 분변을 받아 오셨을 거라 어림짐작하고 분변을 꺼내 접수대에 올려놓으시기만 기다리며 정리를 계속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앉아계신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그러신가? 일단 숨을 좀 돌리시나? 분변도 꺼내야 하니 시간이 걸리시나? 시간은 자꾸 가는데 그래도 안 오신다. 하는 수 없이 반쯤 일어나 용건을 여쭤보려는데 갑자기 드링크 한 박스가 담긴 하얀 비닐봉다리를 턱하고 접수대 위에 올려놓으시는 게 아닌가.
-수고가… 많으시고… 고마워서…
?
-이거 좀 드시라고 사 왔어.
??
-내가 약이 떨어져서 그러는데. 그 □□□□(처음 듣는 약 이름)를 받을라고 왔어.
???!
-두 달 전에 약이 떨어져서…타야 되는데, 아이고 힘들어… 내가 다니기가 힘들어서…
그 약은 어디서 받으셨는데요?
-△△△약국(처음 듣는 약국)에서 받았어.
뭐라도 알아보려고 성함과 생년월일을 여쭤보았다. 아이고, 24년생이시다. 내과에서는 진료나 처방받으신 적이 없다. 2년 전에 분변잠혈검사를 하신 게 다다.

-약 좀 지어줘. 잉?
여기는 약을 처방하는 데가 아니에요. 검진하는 데에요, 진료를 보는 데가 아니고. 내과나 정형외과에 가보셔야 할 거 같은데. 그리고 이거는 거기 원장님께 드리시구요.
-어휴, 아냐. 아니야.
제가 받을 수가 없어요.
-에이 아니야, 안 돼. 내가 이걸 어떻게 가져왔는데… 무거운 걸 들고.
아니 그래도 제가 뭘 했다고 이걸 받아요? 받을 수가 없어요.
-그냥 놔둬. 근데 어디로 가라고?
3층 내과요. 이거 가져가시고…
손사래를 치시며 뭐라 하시더니 기어이 그냥 가신다. 하얀 비닐봉다리는 남기시고는.
오후에 내과에 내려갔다가 000 님이 생각나서 물어봤는데 내과 샘들도 잘 모르는 거로 봐서 그냥 가셨나 보다. 아니면 다른 데로 가셨거나. 아휴, 그때 내가 모시고 내려올 걸 그랬나?
그나저나 드링크 한 박스는 왜 사 오신 걸까? 한 병도 아니고. 알 것도 같은데 모르겠어서 맘이 편치 않기도 하고 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