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드링크 한 박스

연말로 갈수록 수검자가 늘어나고 그만큼 정리할 것도 많아진다. 검진의 파도가 몇 차례 지나가고 이제 수검자가 뜸한 시간. 이런 틈을 타 얼른 잡무를 처리한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는데도 어째 끝날 기미가 안 보여서 조금 더 서둘렀다. 바로 그때 000 님이 오셨다. 함께 정리하고 있던 권 샘이 낯이 익은 분 같다는, 다 들리는 독백을 날렸다. 나는 분변을 받아 오셨을 거라 어림짐작하고 분변을 꺼내 접수대에 올려놓으시기만 기다리며 정리를 계속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앉아계신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그러신가? 일단 숨을 좀 돌리시나? 분변도 꺼내야 하니 시간이 걸리시나? 시간은 자꾸 가는데 그래도 안 오신다. 하는 수 없이 반쯤 일어나 용건을 여쭤보려는데 갑자기 드링크 한 박스가 담긴 하얀 비닐봉다리를 턱하고 접수대 위에 올려놓으시는 게 아닌가.

 

-수고가… 많으시고… 고마워서…

?

-이거 좀 드시라고 사 왔어.

??

-내가 약이 떨어져서 그러는데. 그 □□□□(처음 듣는 약 이름)를 받을라고 왔어.

???!

-두 달 전에 약이 떨어져서…타야 되는데, 아이고 힘들어… 내가 다니기가 힘들어서…

그 약은 어디서 받으셨는데요?

-△△△약국(처음 듣는 약국)에서 받았어.

 

뭐라도 알아보려고 성함과 생년월일을 여쭤보았다. 아이고, 24년생이시다. 내과에서는 진료나 처방받으신 적이 없다. 2년 전에 분변잠혈검사를 하신 게 다다.

-약 좀 지어줘. 잉?

여기는 약을 처방하는 데가 아니에요. 검진하는 데에요, 진료를 보는 데가 아니고. 내과나 정형외과에 가보셔야 할 거 같은데. 그리고 이거는 거기 원장님께 드리시구요.

-어휴, 아냐. 아니야.

제가 받을 수가 없어요.

-에이 아니야, 안 돼. 내가 이걸 어떻게 가져왔는데… 무거운 걸 들고.

아니 그래도 제가 뭘 했다고 이걸 받아요? 받을 수가 없어요.

-그냥 놔둬. 근데 어디로 가라고?

3층 내과요. 이거 가져가시고…

 

손사래를 치시며 뭐라 하시더니 기어이 그냥 가신다. 하얀 비닐봉다리는 남기시고는.

오후에 내과에 내려갔다가 000 님이 생각나서 물어봤는데 내과 샘들도 잘 모르는 거로 봐서 그냥 가셨나 보다. 아니면 다른 데로 가셨거나. 아휴, 그때 내가 모시고 내려올 걸 그랬나?

 

그나저나 드링크 한 박스는 왜 사 오신 걸까? 한 병도 아니고. 알 것도 같은데 모르겠어서 맘이 편치 않기도 하고 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