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41화 봄이다
봄이다. 세상에나! 정말 봄이 왔다. 성인이 되고서는 한 번도 입지 않았던 내복을 지난겨울에는 입었다. 양말도 두 겹으로 신었다. 그만큼 추웠다. 아무리 겨울이지만 이렇게까지 추울 수 있을까 싶었고 이 겨울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끝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었나? 그런데 그런 겨울이 가고 마침내 봄이 오다니. 아침 출근길이 춥지 않다니, 낮에는 15도가 넘다니, 따뜻한 바람이 불다니… 세상에. 경이로웠다. 계절이 바뀌는 게 경이롭기까지 하다니.
검진센터의 접수대 위에는 화분이 하나 있다. 화분 옆에는 ‘12. 5. 15 000 님 기증’이라고 검은색 유성 사인펜으로 쓰여 있다. 내 글씨다. 그날 000 님이 검진을 마치고 가신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화분을 들고 다시 오셨다.
-검진 잘 받았어요.
네~. 괜찮으시죠?
-괜찮지요. 이거…
이게…?
-그냥 가는 길에 이뻐서 샀어요. 여기 두라고.
네? (이걸 왜)
-그냥 여기 둬요. 그럼 이만.
네? 아, 이거는… 고,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결국 받기는 했지만 거절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얼른 받기도 뭐한 애매한 순간이었다. 재작년에 한 번 분갈이하고는 별로 신경 쓴 게 없는데도 그 때 받은 제라늄 화분이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다. 제라늄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 도톰한 잎사귀를 문지르면 특유의 진한 향이 난다. 강한 화장품 냄새 같기도 하고 아무튼 독특한 향이다. 처음 받을 때는 이름도 몰랐다. 갑자기 화분 얘기를 꺼낸 이유는 이렇다. 올 1월인가 한창 추울 때 그러니까 아까 말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겨울 어느 날, 문득 화분을 바라보다가 000 님은 어째서 그 뒤로 한 번도 안 오시는 걸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해서 무심코 000 님의 진료 기록을 열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대부분 기록에는 없으므로 무관심했던 항목인데 내 진료 기록에도 생기고 나서부터 눈에 잘 띄는 ‘추가정보 중증 암/화상 등록대상자(본인부담5%)’이다. 숨을 한번 쉬고 자세히 보기를 눌렀다.
-구분 암1, 등록일 2013-05-30, 종료일 2018-05-29, 특정기호, 등록번호, 상병코드…
-구분 암1, 등록일 2017-06-21, 종료일 2022-06-20, 특정기호, 등록번호, 상병코드…
아래 17년도 것은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맞다, 내 기록이다. 작년에 항암치료를 하고 나서는 암 투병을 하신 분들을 보면 더 이상 남의 일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글자 그대로 내가 겪었으니까. 아하, 부디 000 님도 무사히 건강을 회복하시길 내 일처럼 바라본다.
…경이로운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