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70화 친구 덕분에?
-너, 내가 암에 걸린 거 잘 알지? 죽다 살아난 거 알지? 내가 다 준비해 놨으니까 너는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돼. 알았지? 할 거야 말 거야? 안 할 거면 친구고 뭐고 여기서 끝내고!
000 님에겐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위의 대사처럼 바로 넉 달 전에 본인이 위암에 걸린 것이다. 50이 다 돼가는 인생, 별생각 없이 처음으로 건강검진이란 걸 했는데. 건강에는 자신 있었고 좋아하는 산에서, 맑은 물, 맑은 공기 마시며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그런데 덜컥 암이 찾아왔다. 다행히 일찍 발견해서 위절제술로 끝낼 수 있었다. 항암치료도 필요 없었다. 그러니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일단 자기처럼 술, 담배 좋아하고 혼자 사는, 검진 한 번 안한, 하나뿐인 친구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 친구가 모르게 검진은 물론이고 대장내시경까지 예약했다. 너도 검진 한 번 해보라고 하면 당연히 하지 않을 것이므로.
친구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게 귀찮았다. 먹으래서 먹기는 했지만 물 마시는 것도 설사하는 것도 번거롭기는 매한가지였다. 하기 싫은 표정도 역력했다. 지금까지 병원 한 번 간 적 없이 잘 살아왔는데 검진은 왜 하나 싶었다. 심지어는 지가 걸렸다고 나까지 걸리라는 소린가 찜찜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1차 검진을 마치고 위, 대장 내시경 검사를 기다리던 중에도 담배 한 대가 간절했다.
그리고 마침내 검사. 결과는?
위와 대장에서 모두 암이 나왔다. 더블 프라이머리 캔서(double primary cancer). 일반적으로 암은 한 곳에서 생겨 다른 곳으로 전이된다. 그런데 그런 원발암이 두 곳에서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당연히 아주 드문 경우다. 게다가 본인도 아니고 친구가 검진을 예약해서 암을 발견한 경우라니. 그래도 일찍 발견되어서 000 님과 마찬가지로 수술 뒤에 항암치료도 없었다. ‘다행이다, 운이 좋다’는 말만으로는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아무튼 내가 검진센터에서 일한 뒤로 지금까지 딱 한 번 볼 수 있었던 사례다.
운명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친구, 운명적인 친구는 있을 것이다. 그런 친구가 없으시다고?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비관하지는 마시길. 인생에선 누구나 외로운 구석이 있기도 하고 오늘도 비 온다고 하더니 볕만 쨍쨍하고.
흠, 그래도 건강검진은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