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107화 퇴근하고 한잔하는 이유
평소보다 40여 분 일찍 출근했다. 아무도 공단 사이트에 접속하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3년마다 하는 검진기관 평가는 먼저 온라인으로 처리해야 하는 작업이 있는데 업무 중에 하려니 접속자가 많아서인지 자꾸 지연되고 에러가 나고 끝내 저장도 안 되었다. 나 같은 생각으로 일찍 나오거나 한밤중에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업무 시간보다는 낫겠지 하는 맘으로 서둘렀다. 그런데 검진센터 문을 열려다가 깜짝 놀랐다. 그 이른 시간에 두 분이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검진은) 8시 반부턴데…?
-괜찮아요. 기다리지 뭐. 버스 때문에… 다음 꺼 타면 너무 늦어서…
아~네. 일단 안에서 기다리세요.
-그래도 되나? 허허. 그럼…
보안기를 끄고 문을 열고 불을 켰다. 들어오시는데 걸음이 아주 느리시다. 어디 불편하신가? 암튼 컴과 장비들의 전원을 넣고 옷을 갈아입고 왔다. 그리고 늘 하듯이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열고 공단에 접속했다. 앉아 계신 두 분을 보며 접수를 먼저 할까 하다가 어차피 병리 샘, 방사선 샘이 나오시려면 아직 멀어서 성함과 생년월일만 받아 적고는 본래 하려던 검진기관 평가 온라인 저장 작업을 시작했다. 하고 보니 예상보다 너무 빨리 끝나서 싱거웠다. 이렇게 간단한걸. 근데 아직도 8시 5분.
갑자기 생긴 여유에 당황하고 있는데 적어 놓은 성함과 생년월일이 눈에 들어왔다. 한 분이 39년생. 아시다시피 만40, 50, 60, 70, 80세는 생활습관 등등 할 게 많다. 지금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미리 문진표라도 작성하자는 생각으로 접수하고 소변컵을 드렸다. 역시 느린 걸음으로 아주 천천히 화장실로 가셨다. 이분은 노인신체 기능검사(3미터 걷기, 한 다리로 서기)도 있는데 ‘잘’이 아니라 ‘하실’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윽고 소변을 받아 오셨고 신체 계측을 시작했다. 물론 아주 천천히. 이제 문진표 작성 차례.
-12살 때부터 피웠으니까 뭐…
-요즘에? 하루 한 갑은 피우지.
-매일 두어 병씩 마셔. 아침에 한 병, 저녁에 한 병.
(마땅한 대꾸가 생각나지 않는다) 바지를 아주 시원한 걸 입으셨네요.
-허허허.
따로 하시는 운동은?
-이 나이에 운동이 뭐 있겠어? 4년 전에 혼자되고… 다리도 다치고 허리도 안 좋아서…
노인신체 기능검사까지 간신히 마치고 자리에 와 앉았다. 갑자기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이유가 있다. 내가 일찍 나온 이유, 이분들이 일찍 오신 이유, 함께 오신 이유, 걸음이 느린 이유처럼 쉽게 알 수 있는 이유도 있고 술과 담배를 계속하시는 이유처럼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이유도 있다. 그뿐이랴. 세상엔 이해하기도 어려운 걸 넘어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이유도 많다. 게다가 가면 갈수록 모르겠는 게 점점 많아진다. 거기에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에라, 모르겠다. 이따가 퇴근하고 술 한잔?
하고 보니 출근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퇴근 생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