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97화 공룡이 생각나다
이제 나무에도 푸른 잎이 가득하다. 철쭉이 한창이고 수수꽃다리도 곳곳에서 진한 향을 내뿜는다. 횡단보도의 한쪽 끝에서 겨우내 접혀있던 그늘막도 펼쳐졌다. 오락가락하지만 미세먼지도 한 달 전보다는 덜 한 것 같다. 이렇게 변할 것은 변하지만 그중에는 변한다기보다는 그냥 돌고 도는 것에 더 가까운 것도 많아서 뭔가 좀 변했으면 하고 바라는 입장에서는 답답할 때가 있다. 무슨 거창한 담론을 들먹이려는 건 아니다. 그냥 늘 하듯이 수면내시경 보조를 했고 그러다가 간만에 손목이 삐끗해서 소염진통제를 먹어야 하나 그냥 파스나 붙일까 고민하면서 내시경실에서 나와 접수대로 가는 사이 병리실에서 들린 얘기 때문이었다.
-아니 뭔 피를 왜 그렇게 많이 뽑아?
(병리샘) 그냥 적당히 뽑는 거예요. 검사할 수 있을 정도만. 제가 피를 많이 뽑아서 뭐 하겠어요?
-뭐하긴 팔아먹지!
(웃음) 어디다 파는데요? 아시면 저 좀 알려주세요?
-적십자에 팔지.
요즘은 안 사요.
-??
매혈을 안 한다고요.
-매혈 안 해?
네.
- … ….
매혈, 정말 오랜만에 이 단어를 들은 바로 그때, 갑자기 꽤 오래전에 봤던, 다 읽지는 못했고, 당연히 줄거리는 물론 주인공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최인훈의 소설 ‘화두’의 서문(?)이 떠올랐다. 인류라는 공룡. 머리는 21세기를 넘보는데 그 커다란 몸통은 20세기에 걸쳐있고, 그리고 꼬리는 아직도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근데 그 검사는 왜 안 해?
어떤 거요?
-왜 그 가슴에다 이렇게 뭐 붙여가지고 하는 거 있잖아. 이렇게, 이렇게.
심전도요?
-응, 그거.
그거 검진에서 빠진 지 꽤 되었는데, 한 10년 넘었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