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92화 물러날 때를 알아야
드디어 그분이 오셨다. 사정은 이랬다. 한 달 전 검진하러 오셨다가 피검사는 빼먹고 가신 분이 있었다. 뒤늦게 혈액 샘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연락 드렸지만 이미 식사를 하신 뒤였다. 먼저 잘 챙기지 못한 것에 사과 말씀을 드리고는 다음 날 아침 공백으로 다시 오시기로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오시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서울에 가셨고 3일 뒤에 오신단다. 갔다 오시면 꼭 나오시라고 말씀드리고 기다렸건만. 흠… 열흘이 지나고 또 지나고.
그리고 오늘 오신 것이다. 오늘은 그때 못했던 위암검진(위내시경검사)을 하기로 예약하신 날이다. 두 가지가 궁금했다.
(첫째…) 근데 연락드렸을 때 서울 갔다 오시면 나오시기로 하시구선 왜 안 오셨어요?
-아니, 그런 연락은 못 받았는데?
그때 같이 오셨던 (남편) 분께 전화 드렸는데…
-그런 말 안 하던데.
아무튼(결론: 전달 안 됨. 뭐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둘째…), 근데 이건 뭔가요?
-변 받아 온 건데.
이거는 저희가 쓰는 통이 아니라서… (분변통을 꺼내 차트번호와 이름을 적으며) 이 통에 옮겨 담아 주시겠어요?
-이거? 이거 여기서 받아간 통이야.
예에? 여기서 받아가셨다고?
-여기서 줬다고.
여기서? 여기 검진센터, 5층에서요? 그날?

-그래, 여기서 받았다고.
저는 이런 통을 본 적도 없는데?
-에이, 여기서 준거라니까!
제가 드렸나요?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짐)
-아니, 여잔가? 아무튼 그건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여기서 받아 간 거야.
여기는 이 까만 통만 쓰는데요?
-여기서 줬다니까.
혹시 다른 데서 받으신 건 아니구요?
-다른데? 아닌데. 여기야, 바로 여기.
여기서는 이런 통을 쓴 적이 하~안 번도 없는데?
-몰라, 그거는. 근데 (확실히) 여기서 받았어.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고 했던가.
어쨌든 오셨으니까 다행이고… 요기다가 요거(설압자) 이용해서 옮겨 담아 주시고요. 화장실은 저기 복도 끝 오른쪽이구요. 담은 통은 저 파란 바구니에 놓으시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