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4화 71년생인 내가 노인?
자궁경부암검진을 하신 분이 결과지를 받으면 제일 흔하게 보는 말이 ‘반응성세포변화’일 거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자주 입력하는 판정 결과가 ‘정상 소견이나 반응성세포변화가 있어 6개월 뒤에 재검하시기 바랍니다’이기 때문이다.
자궁암경부검진의 판정은 1.이상소견 없음, 2.반응성 소견 및 감염성질환, 3.비정형 세포이상, 4.자궁경부암 전구 단계, 5.자궁경부암 의심, 6.기타로 나뉜다. 실제로 1.이상 소견 없음은 생각보다 드물다. 제일 많은 결과는 2.반응성 소견 및 감염성질환. 여기에는 트리코모나스(기생충), 캔디다(곰팡이), 방선균(균), 헤르페스(바이러스) 등 감염성 질환도 있지만 반응성 소견이 훨씬 많다. 이 반응성 소견에는 반응성세포변화, 노인성변화, 염증 치료 후 재검, 4~6개월 내 재검 등이 있다. 나는 잘 관리하는데 검진을 하면 항상 뭔가 나오니까 내가 문제 있나 짜증나는 분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좀 애매한 ‘4~6개월 내 재검’을 빼면 대체로 정상 소견이나 어찌어찌하니…라고 항상 정상임을 먼저 말하는데 그만큼 흔하고 또 염증 같은 자극에 대한 정상 범위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해서 너무 스트레스받지는 마시길. 물론 불편하면 진료를 보시면 되고.
그리고 노인성 변화가 반응성세포변화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나온다. 대체로 50세 이후 여성에게 나타나는 에스트로겐의 변화, 그러니까 호르몬이 줄어서(위축) 일어나는, 특별한 원인이 없다면 그냥 나이가 들어 생기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다들 노안에 흰머리는 진즉에 생겼고 어딘가 삐걱거리고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 올라가고 배 나오고 날파리증(비문증)에다 이명도 생기고 그러시지 않나? 어쩌다 보니 나의 상태를 말해버렸는데 아무튼. 아닌가?
검진센터 일을 한 지 3년 정도 지나 병리샘, 방사선샘과 나 셋이 꽤 친해졌을 무렵 병리샘의 자궁경부암검진 결과를 입력하다가 ‘노인성 변화’를 발견한 방사선샘이 눈물을 훔치며(실은 그냥 시늉을 하며 반은 장난으로) ‘우리 병리샘 이제 어쩌나…’하던 장면이 생생하다. 이 기억 때문일까? 지금도 노인성 변화를 입력할 때마다 결과를 받아든 분의 심정은 어떨까 살짝 걱정된다. 이제 막 50을 넘긴, 70년대 초에 태어난 분들에게도 이 표현을 입력할 때가 적지 않아서다. 경로당에서는 70대도 “어린놈이…” 소리를 듣는다는 고령화시대에 50대에게 노인이라니?
간수치 이름은 너무 어려워서, 노인성은 조금 이른 것 같아서 대신할 만한 적당한 표현이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