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88화 우연과 착오와 다행과…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가명임.)
8시 20분
옷을 갈아입고 검진센터에 내려오니 한 분이 계셨다. 조금 전에 문을 열 때는 안 계셨는데. 8시 40분 예약자의 이름은 ‘박순덕’.
혹시 박순덕 님이신가요?
-아니.
그럼 성함이?
-이용철인데. (뭔가 싸하다. 이용철 님은 예약자 명단에 없다.)
오늘 검진 예약을 하셨나요? 위내시경?
-했어. 오라고 문자도 받았는데.
함 보여주시겠어요?
-지워버렸는데.
그럼 예약지는 가지고 계세요? 왜 그 검진 날짜랑 시간 써서 드린 거?
-안 가져 왔는데.
이 대목에서 지난 87화가 떠오를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런 생각은 안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뭔가 착오가 생겼다는 느낌이 더 컸다.
전화로 예약하셨나요?
-여기 와서 했어.
그렇다면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예약자 명단을 뒤져 보았다. 있다! 심지어 내 글씨다. 내과로 다시 확인해보니 이용철 님이 있다. 접수할 때 확인하는, 따로 프린트한 예약자 명단에만 빠진 건가? 일단 접수하고 검진 진행. 잠시 뒤 내시경실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예약자 명단에는 8시 40분에도 ‘박순덕’ 10시 20분에도 ‘박순덕’! 같은 이름이 있다. 뭐지? 일반, 수면이 다르긴 하지만. 엉킨 게 확실한데 뭔가 찜찜하다.
8시 50분
박순덕 님이 오셨다. 가져오신 예약지에도 분명히 오늘 8시 40분이라고 적혀있다. 아, 어쩌지? 어쩌기는 뭘! 지금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거기에 또 정말 죄송한데 시간이 조금 늦어질 수 있으니 그 점만 조금 양해 바란다고 덧붙였다.
-얼마나요?
글쎄요, 한 30분 정도?
-그래요?
놀라시는 것으로 봐서 일정이 빠듯하거나 바쁘신 것 같다. 그사이에 조회해보니 유방암과 자궁암 검진은 이미 하셨다.
-내가 피검사 한 지 얼마 안 돼서 일반검진은 필요 없는데…
그러게. 내과에서 며칠 전에 하셨네요. 그럼 오늘은 위내시경만 하실까요? 제가 봐도 지금 일반검진을 하시는 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일반검진은 나중에 하셔서 전에 한 것과 비교해보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가을쯤에 예약은 필요 없고 그냥 공복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래요? 그럼 그냥 가을에 할까?
위내시경검사도?
-그러지 뭐.
그러시겠어요? (그러시면 정말 고맙겠다는 표정으로!)
-그래요. 다음에 하지.
아시다시피 예약 잡고 하시면 되고 전화 예약도 되니까…
-아니. 내가 매달 약 타러 오니까 나중에 그때 가서 할 때 잡지 뭐.
그러실까요? (이게 웬일인가?)
-그럼 담에 올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아 참, 오신 김에 변통도 드릴까요?
-아니, 그것도 다음에 약 탈 때 필요하면 받지요, 뭘.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한숨 돌렸다. 가뜩이나 바쁜데 내시경을 욱여넣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본인의 실수도 아니고 괜히 시간만 버리신 셈인데…
10시 04분
박순덕 님이 '또' 오셨다. ‘10시 20분 박순덕 수면(검진)’의 그 박순덕 님이다. 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동명이인.
어디서부터 엉킨 건지 모르겠지만 엉킨 만큼 망가지지는 않은 날이다. 가끔 이런 날도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