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8화 쌤통이네요
정말 필요 없으시다구요?
-안 해도 된다고 그랬다니까요. 그냥 이것만(혈액, 소변, 흉부촬영) 있으면 된다고 했다구요.
아닐 텐데. 뭔가 채용검진 같은 양식이 필요할 텐데. 한 번 더 확인해 보시죠?
-이것만 하면 된다 그랬어요. 딴 거는 필요 없다고.
후~(한숨), 네에~. 그러시면 뭐…
나중에 오셔서 채용검진(신체계측)을 해야 했다는 말씀은 하지 마시라는 얘기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이게 어제 일이다. 그리고 이 대화의 주인공 000님이 오늘 다시 오셨다. 내가 어제 그렇게 강조한 키, 몸무게, 시력 등 신체 계측, 즉 채용검진을 하시러 말이다.
-짜증 나 죽겠어요.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어제 제가 그랬잖아요. (신체 계측을) 하셔야 될 거라고.
-거기서 필요 없다고 그거(혈액, 소변, 흉부촬영)만 하면 된다고 그랬다니까요.
이상하더라니까. 이런 거 하려면 채용검진 양식으로 해야 할 텐데 안 하신다 그래서.
-그니까요. 아, 이게 뭐야. 시간 버리고…
거봐요. 제 말이 맞잖아요. 그 때 확인해 보시라고 했을 때 확인하시지. 참 쌤통이네요…라고 차마 말씀은 못 드렸다. 왜냐면 무례한 걸 떠나서 000님의 말씀으로 판단해 보건대 어제 확인을 했어도 그 담당자는 똑같이 필요 없다고 했을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에.
다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죠, 뭐. 그냥 하셔야지. 거 참, 허허허…
-참나, 흐흐흐…
생각할수록 좀 웃겼다. 000님도 내려놓고 웃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