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99화 힘으로는 안 된다
월차로 쉬고 오니 병리 샘이 어제 난리가 났던 얘기를 들려주셨다.
(병리 샘) 피검사를 하셔야 해요. 조금 따끔할 거예요.
- ….
글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하신 팔에 주삿바늘이 들어간 순간 000 님이 주사기를 잡아 빼셨다. 병리 샘도, 같이 오신 요양보호사도 깜짝 놀라셨다. 일단 지혈하고 있는데 한 말씀 하신다.
-밥 줘, 이년아!
???
근처 요양원에서 검진하러 오신 분이었다. 비슷한 연배라도 아무래도 요양원에 계시는 분들이 거동이 더 불편하시거나 인지장애를 가지신 경우가 많다. 실은 그래서 요양원을 이용하시겠지만 말이다. 방사선사 샘을 부르고, 000 님을 모시고 오신 요양보호사 샘까지 힘을 보태서 팔을 부여잡고 어깨를 붙들고는 다시 샘플 뽑기에 도전하셨는데….
-밥 줘, 밥 줘! 이년아~! 악, 퉤, 퉤퉤!
침까지 뱉으면서 완강하게 검사를 거부하셨는데 그보다는 근육이랄 것도 별로 없는 앙상한 팔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올 수 있는지 모두 놀라셨단다. 그래도 어쩌겠나, 검사는 해야 하고-산전수전 다 겪으신 병리 샘이 물러나실 분도 아니다. 전에 정말 하염없이 우는 아이를 설득, 30분 만에 뽑으시는 것도 봤다-진이 다 빠진 병리 샘이 혹시나 하는 맘으로 작전을 바꾸신다.
000 님, 피를 뽑으면 밥을 드릴게요.
- ….
밥 많~이 드릴게요.
-쪼끔만 줘.
에?
-밥 쪼끔만, 쪼끔만 줘!
(나) 그래서 뽑으셨어요?
(병리 샘) 네. 이게 이 나이에 제가 얻은 교훈이에요.
‘달래야 한다. 힘으로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