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6화 지금 사람 무시하는 거예요?
검진센터에서 나는 친절한 직원인가? 그렇다. 아주 가끔은 “정말 친절하시네!”라는 말씀도 듣는다.
사람이 좀 착해서 그렇지 인간성은 그저 그렇고 매사에 대체로 무심하고 회의적인 내가 친절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비법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시간이 걸려도 할 얘기는 다 하기. 뭔가 빼먹고 설명하면 꼭 그걸 되물으시는데 그게 시간이 더 걸린다. 지금 하는 검사와 이어질 검사를 계속 알려드리기. ‘먼저 키, 몸무게(를) 재보겠습니다. 재고 나면 ‘이제 청력검사 하겠습니다.’ 신체 계측이 끝나면 ‘피검사, 엑스레이가 남았어요. (손가락으로 대기 공간을 가르키며) 잠깐 기다리시면 안에서 부르실 겁니다.’ 등. 하지만 최고는 따로 있다. 수검자가 키 몸무게를 재기 위해 신발을 벗고 신장 체중계에 올라갔을 때 “허리 쭈~욱 펴시고…”와 동시에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당신이 아무렇게나 막 벗어 놓은 신발을 집어 내려오시면 신기 편하도록 가지런하게 놓는다. 이 순간 사실상 게임은 끝난다. 그런데…
“지금 사람 무시하는 거예요?”
어쩌다 이런 대사를 듣게 되었을까? 지난겨울, 연말이 그렇듯이 검진센터가 한창 북적일 때다. 접수 중에 질문을 받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또 이런 걸 물어보시나 그런 짜증 나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질문은 받은 직후 바빠 죽겠는 이 시간에 뭐라고 답변해야 가장 짧고도 효과적일까 머리를 굴렸다. 문제는 굴림의 속도가 너무 느려서 물어보신 분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모니터만 보면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직원을 보게 된 것이다. 뜨끔했던 나는 일단 눈을 마주치고 ‘잠시만요’라도 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는데도 또 그 순간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오해를 풀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가지 않고 있는 머리를 굴렸고 또다시 그만큼 반응이 없는 상태가 이어졌다. 내가 그분이라도 기분 나빴을 상황이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라고 두 번째 강타를 맞고서야 아니 그게 아니고, 죄송한데, 무시가 아니라 제가 지금 너무 정신없고… 그랬던 것 같다. 그 이후는? 기억이 안 난다.
최고의 스킬을 시전하기 전에 고장 나는 일은 피해야겠다. 가능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