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38화 적당한 선
수면내시경을 막 끝낸 000 님은 의식이 돌아오기 전인데도 자꾸만 일어나려고 하신다. 내시경 중에도 어찌나 힘을 쓰시든지 당황했었다.
000 님! 내시경 검사 끝났어요. 조금 더 누워 계세요!
그래도 계속 일어나시려다 마침내 나를 발견하셨다.
-뭐 하는 거야? 너, 몇 살이야?
말을 섞으면 안 된다. 나는 000 님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침대 반대편으로 갔다. 계속 일어나려 하신다. 윗몸을 일으키려다 안 되니 다시 눕고 하다 보니 침대 위로 계속 올라가 머리 하나만큼 침대 밖으로 나와 버렸다. 불안한 자세다. 그냥 가버릴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끌어 내리려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너, 몇 살이냐?
수 초간 고민했다. 그러는 너는 몇 살이냐고 대들까? 지금 제정신이 아니신데, 욕먹은 적도 있었는데 까짓 이 정도 가지고. 그래도 피하고 싶다. 누워계시라는 말씀을 반복하는 사이 어느 정도 정신이 드신 뒤에는 잠잠해지셨고 나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잠시 뒤에 내시경실에서 나오셨다.
괜찮으세요?
-어, 어지럽네… 어지러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데 깨는데 시간이 걸리는 분도 계세요.
-쫌 어지러워…
편안하게 쉬세요.
-목도 좀 잠기고…
이제 물 드셔도 됩니다. 물 좀 드릴까요?
고개를 끄덕이셨다. 물을 갖다 드리니 고맙다 하시고는 자꾸 목을 만지시며 뭐라 하시는데 잘 안 들인다.
-(작은 소리로) 전에 목이 잠겨가지고… 몇 개월을 고생해서… 어느 날 몸이 찌뿌드드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계속 안 좋아요. 아침에는 팔다리에 기운이 빠지고. 그래서 강대 병원(강원대학병원)에 갔는데 나중엔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뇌경색이래. 그때부터 한 6개월을 말을 못 했어요.
어이구, 큰 고생 하셨네.
-그나마 다행이지. 친구 놈들 중에는 아예 반이… (반신불수 되었다는 몸짓) 내가 운동을 좋아하거든. 축구고 당구고.
구기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공만 보면 아무튼. 축구도 내가 꽤 오래 찼거든. 내가 지금 양띤데 웬만한 젊은 사람보다 공을 더 잘 찬다구. 그런데 갑자기 뇌경색이라니. 후우~. 그때 이후로 조금만 이상하면 한밤 중에도 응급실로 달려갔지. CT 찍고, MRI 찍고 근데 별 이상은 없는 거야. 그러니까 집사람은 싫어하지. 그래도 어쩌냐고? 안심이 안 돼요, 안심이! 아시겠죠?
그런 일을 겪으셨으니까…
-이번에도 속이 안 좋다니깐 원장님이 그럼 한번 보자고 하시더라구요.
괜히 스트레스 받고 걱정만 하시는 것보다는 그게 낫죠.
-근데 별 이상이 없다니 다행이네.
건강에 대해서는 워낙 자신 있었는데 한 번에 무너지다 보니 충격이 더 크셨나 보다. 건강을 자신하다가 병을 키우는 것 보다는 차라리 건강염려증이 나으려나? 약간 병약한 사람이 오래 산다던데, 오래 산다고 꼭 행복한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디까지 걱정하고 어디까지 대비하는 게 좋을지, 적당할는지 잘 모르겠다. 조금만 이상해도 응급실을 찾는 것도, 어지간히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는 것도 모두 문제니까.
적당한 것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울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