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대비

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언제부턴지 ‘쿵작쿵작’ 트로트 가락이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길 건너 정육점이 개업하는 날이다. 아니나 다를까 창밖으로 내다보니 은빛 술을 단 만국기가 펄럭이는 그 아래로 개업 행사가 열리고 있다. 2주 전부턴가 독일풍의 정육점이 문을 연다는 현수막이 붙었었다. 이곳은 ‘그날 잡은 쇠고기’를 파는 정육점이 있던 자리다. 그냥 정육점이 있던 자리에 다른 정육점이 들어온, 아무것도 아닌 얘긴데 그런데 이 정육점의 위치가 참 독특하다. 이 동네의 중심, 사거리의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사거리는 사거리라고 해도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그런 사거리다. 원래 춘천 인구가 의외로 적다. 가끔 지인들이, 특히 겨울에 방문하면 다들 한마디씩 한다. 동네에 왜 이렇게 사람이 없냐고. 아무튼 여기는 왼쪽은 아웃도어 매장 오른쪽은 휴대폰 대리점이 있는, 전에는 카페가 있었던 자리다. A 카페가 있다가 문을 닫고 B 카페가 들어왔고 맛도 괜찮아서 1년 반 정도 잘 이용했다. 그런데 ‘대박 나서 장가’가겠다던 젊은 사장님이 어느 날부턴가 하루 이틀 문을 안 여시더니, 가끔은 일주일씩 닫으시더니 끝내는 아예 접으셨다.

여기에 정육점이 들어왔다. 카페가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정육점이 개업하고는 정육점이 있을 만한 자리는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라면 한 봉다리 사러 동네 마트에 가면 모를까 보통 장을 볼 때 한둘이 아니라 이것저것 한꺼번에 사지 않나? 그래서 시장이나 대형 마트를 이용하는 거고. 근데 여기는 딱 고기만 사러 와야 하는 곳이고 지나가다가 오늘 저녁엔 고기나 좀 구워볼까 하고 들르기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그럴 사람들은 아닌 애매한 위치다. 쓰다 보니 어쩐지 이제 새로 개업하시는데 뭣도 모르면서 갸우뚱거리는 것 같아 괜한 얘기를 꺼낸 것 같다.

안은 조용한데 쓸쓸하고 조금 어둑하고 밖은 환한데 습하고 덥고 구름은 뭉실뭉실. 그 사이로 나른한 가락의 개업 이벤트가 열리고.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는 대비 때문인지 괜히 심란하다. 퇴근길에 이 독일풍 정육점에서 부대찌개 세트와 소시지를 좀 사갈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