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89화 혈압계여, 잘 갔다 오라!
3월이면 비교적 한산하고 여유도 조금 있었는데 요즘엔 연말인가 싶을 정도로 바쁠 때가 적지 않다. 채용검진이 특히 요맘때 많기도 하고 일반검진의 대상자가 '20세부터'로 확대된 것도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이 와중에 혈압계가 맛이 갔다. '시작’을 눌러도 잘 반응하지 않는 지가 오래되기는 했다. 버튼의 중심에서 약간 왼쪽 가장자리를 누르거나 너무 세지 않게, 너무 짧거나 길지 않게 눌러야 작동했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섬세하지만 몰라도 그만인 기술이 필요했다. 여유가 있으면 한 번 더 누르는 거야 별 게 아닌데 바쁠 때 그러면 문제다. 시간만 까먹는 게 아니라 수검자의 입장에서는 측정기기에 대한 신뢰는 물론이고 검진센터에 대해서도 별로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근데 고치려고 하면 또 그러다가 멀쩡하게 돌아가기도 한다. 쭉 그랬다.
그러다가 사달이 났다. 검진이 썰물 같이 빠진 11시 30분, 나는 느긋하게 문진표 작성을 돕고 혈압계의 버튼을 누르고는 뒤로 물러났다. 지잉~ 소리와 함께 조여지고 풀리며 혈압이 측정되는 그 30초 동안의 짬에는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기도 하고 전화 등 급한 다른 일을 보기도 한다. 이번에도 그렇게 전화를 받고 돌아왔는데… 아직 혈압 측정이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 또 기다리는데…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뭐지? 다가가 보니 혈압계의 숫자가 패턴을 잃고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나는 바로 멈춤 버튼을 눌렀다. 너무 아프면 ‘멈춤’을 누르라는 안내가 있지만 이분은 내내 참고 있었던 거다. 좀 답답하기도 했지만, 혈압계가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는 당연히 그럴 수도 있고 또 이건 분명 혈압계의 문제이지 수검자를 탓할 상황이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많이 아프시죠?
- … …
먼저 잠깐 쉬시구요. 여기 물도 드시고. 쫌 있다가 저기 수동혈압계로 다시 재 드릴게요.
일단 수동혈압계를 쓰면 되지만 오늘같이 검진이 밀리면 그 30초의 짬도 무시할 수 없어서 내과에 있던 혈압계를 가져오고 검진센터 것은 바로 수리를 보냈다.
너도 참 쉼 없이 고생했다. 가서 잘 치료받고 와!
미세먼지 탓에 바람 쐬고 오라는 말은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