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혈압계여, 잘 갔다 오라!

3월이면 비교적 한산하고 여유도 조금 있었는데 요즘엔 연말인가 싶을 정도로 바쁠 때가 적지 않다. 채용검진이 특히 요맘때 많기도 하고 일반검진의 대상자가 '20세부터'로 확대된 것도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이 와중에 혈압계가 맛이 갔다. '시작’을 눌러도 잘 반응하지 않는 지가 오래되기는 했다. 버튼의 중심에서 약간 왼쪽 가장자리를 누르거나 너무 세지 않게, 너무 짧거나 길지 않게 눌러야 작동했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섬세하지만 몰라도 그만인 기술이 필요했다. 여유가 있으면 한 번 더 누르는 거야 별 게 아닌데 바쁠 때 그러면 문제다. 시간만 까먹는 게 아니라 수검자의 입장에서는 측정기기에 대한 신뢰는 물론이고 검진센터에 대해서도 별로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근데 고치려고 하면 또 그러다가 멀쩡하게 돌아가기도 한다. 쭉 그랬다.

그러다가 사달이 났다. 검진이 썰물 같이 빠진 11시 30분, 나는 느긋하게 문진표 작성을 돕고 혈압계의 버튼을 누르고는 뒤로 물러났다. 지잉~ 소리와 함께 조여지고 풀리며 혈압이 측정되는 그 30초 동안의 짬에는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기도 하고 전화 등 급한 다른 일을 보기도 한다. 이번에도 그렇게 전화를 받고 돌아왔는데… 아직 혈압 측정이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 또 기다리는데…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뭐지? 다가가 보니 혈압계의 숫자가 패턴을 잃고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나는 바로 멈춤 버튼을 눌렀다. 너무 아프면 ‘멈춤’을 누르라는 안내가 있지만 이분은 내내 참고 있었던 거다. 좀 답답하기도 했지만, 혈압계가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는 당연히 그럴 수도 있고 또 이건 분명 혈압계의 문제이지 수검자를 탓할 상황이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많이 아프시죠?

- … …

먼저 잠깐 쉬시구요. 여기 물도 드시고. 쫌 있다가 저기 수동혈압계로 다시 재 드릴게요.

 

​일단 수동혈압계를 쓰면 되지만 오늘같이 검진이 밀리면 그 30초의 짬도 무시할 수 없어서 내과에 있던 혈압계를 가져오고 검진센터 것은 바로 수리를 보냈다.

 

너도 참 쉼 없이 고생했다. 가서 잘 치료받고 와! 

미세먼지 탓에 바람 쐬고 오라는 말은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