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24화 한계
외래에서 오신 000(남 29세)님은 검진 대상이 아니어서 따로 접수를 하지는 않았다.
수면할 때 쓰는 진정제에 대한 설명인데 천천히 읽어보시고 여기에 성함하고 싸인을 해주세요.
-근데 저번에 수면이 안되서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계속 구토하고, 많이 움직이고…
움직이고 그런 게 다 기억나신다구요?
-네, 다 생각나요. 이렇게 쑥 들어와서 구토하고 진짜 힘들었어요.
아, 네. 여기서 하셨어요?
-아니요 저기 00의원에서 했었어요.
원장님께 말씀 드렸나요? 수면 유도가 잘 안된다고.
-아뇨. 말은 안했는데…
네에. 제가 검사 전에 말씀드릴게요.
외래 기록을 보니 별다른 코멘트가 없었다. 드디어 000님의 차례가 되었고 전에 수면 유도가 잘 안되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원장님이 묻는다.
술을 많이 드세요?
- … …
거의 매일 드신데요. 그것도 소주 두 병씩이요.
- …
000님이 머뭇거리자 옆의 김샘이 대신 전했다. 수면제의 용량을 수정하고 검사에 들어갔다. 나도 긴장하며 000님의 손목을 잡았다. 검사가 시작되고는 별 움직임이 없더니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러 고비에 불구하고 그래도 버티고 버티던 나의 ‘잡는 자세’가 무너졌다. 손을 놓치고 다리가 올라오고. 우아~~악!
우여곡절 끝에 내시경을 마쳤지만 허탈했다. 뻐근한 팔을 주무르며 어느 부분, 어떤 순간에 자세가 흐트러졌나 다시 생각해보고 있었다. 잠시 뒤 000님이 나오셨다. 괜찮은지 여쭤보니 다행히 이번에는 전혀 기억이 없다.
000님은 기억의 한계를, 나는 제어의 한계를 넘어갔다. 더 이상의 전에 잡던 자세만으로는 무리다. 그렇다고 새로운 자세를 계발하는 것도, 도구를 이용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렇다면? 힘을 기르자!
피곤한 듯 졸고 있는 000님을 바라보며 운동의 필요성을 새삼 느끼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