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80화 새해 일기
이제 사흘이 지났다. 작년? 작년이라, 벌써 작년이라는 말을 쓰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아무튼 작년 연말에도 검진센터는 예외 없이 북새통이었다. 그리고 새해가 밝았다. 출근해서 보안기를 끄고 문을 열고 컴퓨터를 비롯한 점진센터의 이런저런 장비들 전원을 켜는 것은 여전하다. 달라졌다면 이 공간을 꽉 채웠던 수많은 말, 분주한 걸음들, 울리던 전화벨, 차고 넘쳤던 채뇨 바구니, 날아갈 듯 휘갈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그 와중에 터졌던 공단 서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단지 하루라는 날짜가 바뀌었는데 말이다. 그 하룻밤이 ‘한 해’라는, 등짐이 젤 무거울 12월 31일과 1월 1일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작년에 다하지 못한 일거리는 잔뜩 쌓여있다. 지난 회에도 말씀드렸지만 늘어난 수검 인원만큼 잡무도 늘어나서 발송, 청구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일이 늘어날 걱정은 없으니 마음의 여유는 가져도 되지 않을까. 특히 18년도는 건강검진이 바뀐 게 많아서 연초에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었는데 적어도 올해는 그런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잘한 것은 있는데 그중에 40세, 50세, 60세, 66세, 70세 등 늘어난 문진표 작성을 검진 당일에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눠서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현장의 실상과 동떨어진 결정은 대체 누가 내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쁘니까 검진 당일이 아니라 다른 날에 와서 나머지 문진표 작성을 할 수 있게 하겠다는 얘긴데 그만큼 늦어지는 결과 통보는? 중복되는 일은? 두 번씩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시간과 돈은?
검진센터에서 몇 년 일한 것만으로 의료계의 전반이나 구조적인 문제를 잘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하지만 나 같은 잔챙이라도 보고 듣고 느낀 게 있다면 가면 갈수록 그나마 있던 장점은 줄어들고 문제는 곪아서 일부는 이미 터지고 일부는 그래도 버티다가 죽어 나가는, 의료계의 빈부격차 역시 점점 더 벌어져가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큰 놈만 살아남는, 정말 그게 대세일까? 잔챙이 입장에서는 할 수만 있다면 부정하고 싶은데 말이다.
연초부터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안타까운 부고를 들었다. 명복을 비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또 안타깝다… …
아, 그래도 명색이 새해인데, 새해에는 그래도 뭔가, 아니다. 그냥 올 연말, 내년 새해 일기는 즐거운 기억과 희망이 담기기를 바라보자. 흠, 바라고 보니 너무 큰 걸 바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