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17화 기억에 대하여
한 분이 분변통을 받으러 오셨다. 하던 일을 멈출 수 없어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자판을 두드리는데 말씀을 이으셨다.
-다른 건 저번에 다하고 그 뭐냐 대변을 못 해서. 그때 통을 받아 가서 변을 받았는데 며칠을 묵어서 그건 버리고 다시 통을 받아가려구요.
아, 네. 잠시만요.
그냥 통만 드려도 되지만 나중에 변을 가지고 오셨을 때 뭔가 다른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난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해서 통을 드리기 전에 검진 조회를 먼저 하는 편이다. 하던 일을 마치고 성함과 생년월일을 확인하고 차트를 열고 주민번호를 긁어 검진 조회 창에 넣고 엔터를 눌렀다. 해당 항목 모두 빈칸이다.
올해 검진을 안 하셨는데요?
-여기서 저번에 했어요.
언제요?
-여름인가 가을? 암튼 그때 통도 받아 갔는데…
글쎄요. 내과나 검진센터 통틀어 마지막으로 여기 오신 게 21년 11월인데요. 혹시 다른 데서 (검진)하신 거 아닌가요?
-난 여기서만 하는데…
그래서 22년 창을 열었다. 22년도 역시 대장암 검진(분변잠혈검사) 칸이 비어 있다. 21년도 창을 열었다. 21년 10월에 여기서 검진하신 게 보였다. 우리 차트와 같은 내용이다. 이 사실을 몇 번이나 설명해 드렸지만.
-분명히 여기서 했고 그 통을 받아 가서 변을 받았는데 제때 못 가져와서 묵혔고…
검진은 21년 10월이고 그때 피검사, 소변, 엑스레이랑 위내시경 하셨고 내과에 마지막으로 오신 건 21년 11월이고 그 뒤로는 검진센터고 뭐고 한 번도 안 오셨다니까요. 기록이 없어요.
실마리는 안 풀리고 얘기는 겉돌았다. 결국 분변통을 받아 가시기는 했지만 끝내 수긍은 못하신 것 같다.
검진센터에서 배운 교훈 중에 하나가 ‘기억은 믿지 말자’이다. 물론 내 기억도 포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