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73화 그대는 바람
-종합검진 받으러 왔어요.
종합검진? 틀린 표현도 아니고 심지어 검진센터가 있는 건물 바깥에 ‘종합건강검진’이라고 큼지막하게 붙어있는데도 오늘은 왠지 낯설다. 뭔가 모를, 어떤 결말의 복선이 깔리는 느낌이다. 조회해보니 아직까지 검진을 안 하셨다. 먼저 어떤 항목을 어떻게 하는지 간단히 안내하고 나서 한 말씀 더 드려야 했다.
근데 위암검진, 위내시경검사는 예약이 필요한데 저희 검진센터는 연말까지 이미 다 찼어요, 그래서 해당하는 검진을 한꺼번에 다 하시려면 가능한 다른 곳을 이용하셔야 합니다.
-그럼 지금 되는 거는 없어요?
공복으로 오셨으면…
-어제저녁부터 안 먹었어요.
그럼 일반검진, 그러니까 피검사, 소변검사, 흉부엑스레이, 혈압, 키, 몸무게… 재고 뭐 이거는 지금 하실 수 있구요. 또 식사와 상관없는 유방암, 자궁암검진도 받으실 수 있어요.
-그래요? 나는 다 된다고 해서 왔는데…
그러게요. 검진을 다 하긴 하는데 위암검진, 내시경 예약이 꽉 차서요.
-…
조회할 때부터 열어둔 000 님의 차트가… 허하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는 있는데 다른 정보가 없었다. 주소, 전화번호는 물론이고 진료 내역도 없다. 순간 뭔가 두 번째 복선을 만난 것 같았다. 처음 내원하시는 분은 신분 확인을 위한 정보-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정도-를 받아서 차트를 만든다. 그래야 진료(또는 검진)를 하고 오더를 낼 수 있다. 그런데 진료 내역이 없다는 것, 즉 차트만 만드셨다는 말씀은 흔적이 남지 않은 행동을 하셨다는 얘기이고. 이 대목에서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행동'이라면… 그렇다! 오늘도 그냥 가실 확률이 높지 않을까 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뒤통수를 스쳤다.

000 님은 전화기를 꺼내 들며 나가셨다. 아마도 다른 검진기관을 알아보시려는 것 같다. 다시 오시면,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하시고 못 한 것은 다른 곳을 이용하셔도 되지만 아무래도 편하게 하시려면 한 곳에서 몽땅 다 하시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한 번 더 잘 말씀드려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이것은 000 님의 편의를 위해서지 그냥 가실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볼 심산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만은 꼭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해서 지금도 검진센터의 투명한 반자동문 너머에서 전화하고 계시는…
어라, 000 님은 어디 가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