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23화 유전자의 강
할머니, 엄마 그리고 손자 3대 가족이 오셨다. 검진 대상은 그중에 두 분의 여성인데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할머니와 엄마다. 아이의 맑은 목소리에 자꾸 그 가족에게 눈길이 갔다. 그러고 보니 모녀는 전혀 닮지 않았다. 두 분만 있으면 모녀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할 정도다. 그럼 보나 마나 아버지를 닮았을 것이고. 살아오면서 느낀 걸 바탕으로 내 맘대로 만든 유전법칙이 있다. 보통 딸이 아빠를 닮고 아들이 엄마를 닮는다는 건데 대체로 둘째까지 유효하다는 내용이다. 전적으로 내 생각이니 다른 데 인용하지는 마시길.
시원한 이마에 약간 긴 얼굴. 짙은 눈썹. 마른 체형. 콧등에서 꺾이는 게 분명하게 보이는 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딸의 외모에서 그런 할아버지의 인상을 상상해보았다. 그런데 아이는 할머니도 엄마도 닮지 않았다. 커가면서 닮아 갈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현재는 아니다. 그럼 답은 하나. 아빠라고 하는 새로운 유전자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아들이 아빠를 닮다니… 이런! 나만의 유전법칙이 방금 깨져버렸다. 아무튼, 닮는 것이 어디 외모뿐인가. 성격은 물론이고 목소리나, 말투, 식성, 취향 등등 한둘이 아니다. 세대에서 새로운 세대로 이어지는 유전자의 흐름을 생각하니 때로는 이어지고 또 합쳐지고 나뉘는, 도도히 흐르는 강과 같은 유전자의 힘이 느껴진다.
‘인간의 몸은 유전자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뭐 어떤가. 그래도 이 광활한 우주의 한 곳 ‘창백한 푸른 점’에서 태어나 한때를 느끼고 부대끼며 사는,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나라는 인간은 보고 느끼고 그릴 수 있는 거 아닐까.
검진 센터에서는 유전자에서 우주여행까지 가능한가 보다.
흠… 오늘은 작은 일상에서 너무 많이, 멀리까지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