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21화 결과지의 ‘오컴의 면도날’
건강검진을 하면 그 결과를 기록하고 남겨두어야 한다. 수검자는 자신의 결과기록지를 가지고 의사를 만나는 게 검진의 마지막 순서다. 의사와 문진이 끝나면 수검자는 가시고 결과지는 원장님의 책상에 남는다. 이제부터는 나의 일이다. 다음날 나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지를 모은다. 그 결과기록지에 병리샘과 방사선샘이 출력해 주신 각각의 검사 결과를 옮길 건 옮겨 적고 체크할 건 체크해서 담당 원장님들의 판정과 서명을 받는다. 판정이 끝난 기록지는 다시 내가 모으고 최종 결과를 온라인에 입력, 출력, 발송, 청구까지 마치면 검진 행정 업무의 한 ‘주기’가 끝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끔 기록지가 사라질 때가 있다. 그럼 확률이 높은 곳부터 찾는다.
1. 내가 관리하는 날짜별 검진 결과기록지들 사이(에 겹쳐 있는 경우)
2. 내과의 접수대
3. 검진을 총괄하는 2내과 원장님 책상
4. 2내과 원장님 책상 아래, 각종 검사 결과와 채용검진기록지 등이 쌓이는 500매 A4용지 상자
없다? 불안 시작.
5. 온라인 입력이 끝난 결과지들 사이
6. 여성의학과 접수대와 원장님 책상
7. 1내과, 1내과가 일곱 번째인 이유는 이 방에서는 기록지를 찾은 기억이 없음.
그래도 없다? 불안 가중.
8. 판정 전 날짜별 결과지를 보관하는 검진센터 접수대 서랍을 완전히 빼낸 서랍장의 깊은 안쪽. 아주 가끔 서랍을 열 때 뒤로 빠짐.
없다? 냉정이 필요. 크게 한숨을 쉼. 그리고 1.부터 다시.
없다! 짜증은 이미 고점을 찍었지만 한 번 더 전 과정을 반복한다.
없다!!!
진짜 정말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수검자가 가져가시는 경우다.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 걸까 말까 고민한다. 여러분은 검진 결과기록지 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검진센터를 신뢰할 수 있으신가? 그 생각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참 진짜 정말 마지막으로 위의 모든 과정을 반복한다. 없다. 이젠 고민도 사치다.
OOO님이신가요? 여기 검진센터인데요. 저, 죄송한데… 어찌저찌… 결과지가 없는데… 혹시… 가져가셨나요?
-네, 가져왔어요.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