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78화 제라늄을 보내며
끝내 떠났다. 언젠가는 이별을 하리라는 생각을 못 한 건 아니지만 막상 그때가 되니 허무하고 슬프다. 제라늄 이야기다. (이 제라늄이 검진센터에 있게 된 사연←누르시오)
가을부터 좋지는 않았다. 빨간 꽃을 보기는 어려워지고 노란 잎이 늘었다. 팔팔할 때에 비하면 잎의 두께도 많이 얇아졌다. 환경이 바뀐 게 없으니 내부적인 문제 같은데, 말하자면 영양 부족 같은.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관리를 잘하지 못한 것이 제일 큰 이유인 것 같다. 뭐 대단한 관리를 한 것도 아니라서 좀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인터넷도 뒤져보고 너무 물을 많이 주어서 그런가 싶어 조금 줄이기도 하는 식으로 신경을 쓴다고 쓰긴 했는데 끝내 살리지 못한 것이다. 죽은 화분을 검진센터 접수대에 놔둘 수는 없어서 일단 작업실로 가지고 왔다.
작업실에서 가만히 화분을 보고 있자니 함께 했던 지난 6년이 주마등처럼… 그 정도는 아니어도 그래도 왠지 애잔하다. 화분 안에는 말라버린 잎들이 쌓여있다. 그동안 잎이 바라거나 시들면 나머지 다른 잎을 위해 쳐내고는 했다. 그 잎을 따로 버리지 않고 화분 안에 그냥 둔 것이다. 이제 그 쪼그라든 잎을 다 들어냈다. 말라서 초록빛을 잃고 속이 비어버린 줄기도 가위로 잘랐다. 자르고 보니 더 횅하다. 줄기를 남겨 두어 뭐하나 싶어 아예 뿌리도 뽑아냈다. 이제 정말 빈 화분에 다 버리지 못한 잔해들만 남아 있다. 아, 후회가 밀려왔다.
에이씨, 그때 가을에 분갈이할 걸…
그럼 뭐하나 이미 갔는데. 여기서 뜬금없는 교훈 하나. 요즘 독감이 정말 장난 아닌데 걸리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미리미리 예방하자. 백신 맞고 마스크 쓰고 손 잘 닦고. 그래도 걸리는 거야 어쩔 수 없다. 그땐 약 먹고 버텨야지 뭐.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병리사 샘이 그런 경운데 독감이 의심되어 검사하러 오신 분이 글쎄 검사 도중에 바로 코앞에서 재채기를 하신 것이다. 낌새가 이상했던 병리 샘이 다음 날 스스로 독감 검사한 결과 A형 양성! 진즉에 백신을 맞으셨건만 걸리면 걸리나 보다.
이야기가 샜다. 아무튼 이 제라늄이 (위에 눌러보시라는데 눌러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나에겐 각별한 의미여서 행여 화분을 사주셨던 000 님이 검진하러 다시 오시기 전에 비슷한 놈으로다가 사다 놓을 작정이다. 그게 언제가 될 런지 모르겠지만 부디 사다 놓은 후에 오셨으면 좋겠다. 빨간 꽃이 풍성하게 피어있을 때라면 더 바랄 게 없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