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120화 맛이 갔다?
이제는 정말 맛이 갔다. 나 말이다.
오늘은 10월 8일. 000 님은 하반기 간암 검진을 받으러 오셨다. 접수하고 기록지를 바로 병리실에 전달했다. 일반 검진과 상반기 간암 검진은 이미 5월에 하셨기 때문에 다른 건 할 게 없었다. 그냥 피(알파태아단백 검사)를 뽑고 간초음파 검사를 하고 내과로 가시면 된다. 지혈될 동안 나는 초음파 검사 준비를 한다. 병리실에 있던 간암 검진 기록지를 초음파 검사실에 놓고 검사실 컴퓨터 화면에 000 님의 차트를 띄워 놓는 것이다. 오늘처럼 바쁠 때는 아예 관련 중요 사항, 가장 최근의 검사 결과를 메모지에 적어 기록지에 붙여 놓는다. 'B형간염 보균, 담낭 용종 6mm'. 그렇게 하면 혹시 내가 그 자리에 없어도 검사하러 올라오시는 원장님께 쉽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바쁘게 오전이 갔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원장님의 판정을 받을 기록지는 내과로 내리고 판정이 끝난 기록지, 오늘 검진한 기록지를 챙겨서 검진센터로 올라왔다. 입력하고 발송할 것은 따로 놓고 오늘 날짜 기록지를 정리하는데…
엥??? 오늘 하반기 간암 검진을 하신 000 님의 일반 검진 기록지와 간암 검진 기록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오늘은 하반기 간암 검진을 하셨는데? 일반 검진은 이미 하셨는데? 이 일반 검진 기록지는 대체 무언가? 분명 내 글씨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가 쓰여 있는데. 차트를 열어보고 검진 조회 창을 확인해 봐도 이미 5월에 하셨다는 사실만 보여줄 뿐. 그때 결과지는 발송되었고 당연히 청구도 끝나서 ‘수검 완료’가 떠 있고. 아, 요즘 들어 특히 더 자주 조금 전에 했던 일도 깜빡깜빡하더니 드디어, 드디어 맛이 갔구나.
충격에 못 이겨 이마와 목덜미를 번갈아 잡던 그때 기록지 맨 아래 ‘검진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5월 24일. 전에 검진하신 그 날짜다. 내과에서 가져온 것이니 일단 내과에 물어보자. ‘다른 서류에 딸려 와서 빼놓은 거’라는 단순한 대답이 전화기를 넘어왔다. 그리고 그제야 뭔가 하나둘, 어렴풋이 기억이…
5월 말? 6월 초? 아무튼 당시 000 님의 기록지가, 일반 검진과 간암 상반기 검진 기록지가 사라졌다. 검진센터는 물론 내과, 작업실 등등 있을 만한 곳은 다 찾아봐도 허사였다. 혹시 가져 가셨나? 일단 더 찾아보자. 하지만 못 찾고 000 님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가져가신 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양해를 구하고 재측정, 작성했던 기억이…
그 기록지가 하필, 하반기 간암 검진을 하신 오늘, 왜인지는 끝내 알 수 없지만, 내과 서류 사이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와, 세상에 이런 일이. 그리고 다행히 아직 완전히 맛이 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