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33화 전문용어
-저번에는 쌩다지로 했어요.
네?
-쌩다지로 하는데 계속 구역질이 나서 혼났어용. 그래서 이번에 수면으로 해보려고용.
쌩, 쌩다??
-쌩다지로 하니까 어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며) 힘들던데요.
다지, 쌩다…? 아하, 쌩으로! 그냥. 하하, 일반 내시경을 하셨다구요?
-넹
전문용어를 못 알아들어 순간 어리둥절했다.
※생다지: (순우리말) 공연한 억지 (국어사전)
부모 형제 자매 중에 뇌졸중이나 심장병, 고혈압, 당뇨 기타…
-없습니당.
B형간염 바이러스 보유…
-아니구용.
혹시 담배…
-안 합니당.
술은…
-안 마시고용.
따로 하시는 운동…
-해야겠죵?
질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상냥하고 경쾌하게 대답해 주신다. 말끝에 교양이 묻어나는 분이었다. 병원에 오시는 분들의 차림새, 태도, 말투 등을 보면 구체적인 직업은 몰라도 사는 정도나 하시는 일의 강도는 대강 짐작이 간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 주를 이루는 직업을 가진 분들은 다들 이해하실 것 같다. 000님은 세련되고 깔끔한 옷차림에 화장도 자연스러워서 경제적으론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분, 그런데다 예의가 갖추어진 말투, 억양이어서 나는 교육 계통의 일을 하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행정직으로 대학에서 20년이 넘게 근무하셨다니 교육 쪽은 맞추었다. 아무튼 기본 검진을 마치고 위 내시경을 기다리시는 동안 수면내시경 동의서를 받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