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11화 사인이라도 받아 둘 걸
혹시 운동해요?
-네.
무슨 종목?
-펜싱이요.
펜싱? 와~. 펜싱 선수는 처음인데.
9월에는 가끔 중학교 3학년생이 검진하러 오는데 주로 체육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다. 종목은 다양하다. 내가 만났던 친구들은 축구, 권투, 조정, 배구? 아니 농구였나? 아무튼 며칠 전에 레슬링 선수가 왔을 땐 귀를 유심히 보았다. 이번엔 펜싱이다. 마침 어제 아시안 게임 펜싱 사브르 단체전에서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보아서 더 반가웠다. 키, 몸무게를 재는 동안에 물어보았다.
펜싱도 여러 종목이 있잖아요. 어떤?
-에뻬요.
에뻬? 와! 에뻬가 (혹시) 몸통만 찌르는 건가요?
-전신이요.
펜싱을 보다가 갑자기 궁금해서 찾아보니 사브르, 플러레, 에뻬 모두 프랑스어로 ‘검’이라는 뜻이었다. 어라? 그럼, 칼의 종류가 다른 건가 찾아보다가 그만두었다. 줄줄이 이어지는 정보의 양이 점점 많아져서 나의 평범한 머리통에는 담을 공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수를 만났으니 참을 수가 없었다.
다 ‘검’이라는 뜻이던데 칼 이름이 다른 건가요?
-칼도 다르고 (경기) 방식이 달라요.
아하! 더 묻고 싶었지만 이번엔 시간이 없다. 멋진 운동을 하는데 앞으로도 건강하게 잘하길 바란다고 말하고 내 임무를 마쳤다. 남은 혈액검사와 흉부엑스레이를 찍고 갔는데 운동선수가 검진하고 가면 늘 하는 후회를 이번에도 했다. 앞일은 모르니 사인이라도 미리 받아 둘 걸!
※ 맞춤법검사기도 ‘사브르, 플뢰레, 에페’라고 지적하고 인터넷에도 압도적으로 많은데 대한펜싱협회에서는 ‘사브르, 플러레, 에뻬’라고 표기하고 있고 펜싱 선수도 분명 ‘에뻬’라고 해서 그걸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