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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검진센터의 흔한 비밀

이상한 날이다. 시간이 지나는데도 예약하신 분들이 오시지 않고 있다. 예약이 필요 없는 일반검진만 하시는 분, 유방암, 자궁암 검진만 원하시는 분, 분변만 가져오신 분이 이어질 뿐. 이럴 때면 검진센터에는 묵직한 공기가 흐르고 말수가 적어진다. 아니 말수가 적어져서 공기가 무거워진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다. 9시 반이 되고서야 그것도 8시 반에 예약하셨던 분이 오셨다. 늦게 오시면 이런 대사를 친다.

 

좀 늦으셨네요. 가능하면 빨리 (검진을) 해드리겠지만 예약시간에 맞춰 오신 분들이 계시니까 순서대로 하면 늦어질 수 있어요. 그 점은 양해해 주시구요. 그리고 ~.

 

그런데 예약하신 분이 모두 안 오셨으니 기다리고 말 것도 시간을 신경 쓸 것도 없어서 위의 대사도 생략했다. 이런 날 접수대에 앉아 있노라면 딴생각, 엉뚱한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발설한 적 없는 비밀!

우리 검진센터의 병리 선생님은 실은 흡혈귀이시다. 인간의 피를 먹어야 살 수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피를 얻기가 쉽지 않다. 흡혈귀에게도 일상이 있는데 매번 살생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합법적이고도 일상적으로 피를 섭취할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하다. 병리사, 이보다 더 적당한 직업이 있을까?

목적에 따라 다르지만 채혈할 때는 보통 5mL 일회용 주사기를 사용한다. 2mL가 필요해도 5mL를 쓴다. 주사기를 보면 아시겠지만 눈금보다 여유가 있다. 5mL 주사기라도 딱 5mL만큼만 뽑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 조금씩 더 뽑아서 검사는 검사대로 깔끔하게 끝내고 나머지를, 드시는 것이다.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살생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니. 다만 세상살이가 그렇듯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토요일 오전 근무를 끝내고 월요일 아침 출근하기까지 딱히 드실 수가 없으니 주말을 지내고 나오실 때는 기운이 없는 월요병이 그중 하나. 주중에는 계속 섭취할 수 있지만 양이 적은 것도 흠이라면 흠. 우유도 작은 거 한 팩이 200mL인데 고작 5mL 주사기로 더 뽑아봐야 0.2~0.3mL 정도. 그래서인지 체중이 늘지 않고 체형도 조금 마른 편이시다. 내가 봐도 살이 찌실 수가 없다.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혈액검사를 왜 하는지 생각해보면 아실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원인을 찾기 위한 검사. 고지혈이 의심되어 검사한다고 생각해 보시라. 당연히 신선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힘드시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건강검진센터에는 이른바 ‘환자’가 아니라 별 이상이 없는, 그냥 정기적으로 검진하러 오시는 분이 다수이기 때문에 버티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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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오늘따라 왜 검진하러 오시지 않죠?’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수검자가 마구 오시는 쓸데없는 주문을 참고, 실수로라도 그런 대사가 나오지 않도록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느라 공기가 무거운 것이다.

 

흠, 그래도 안 오시네.

이럴 때는 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우리 검진센터의 방사선사 선생님은 실은 외계인이시다. 방사선을 주식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외계인. 원자력 발전소는 더 많은 양을 섭취할 수 있지만, 자리가 많지 않아 (외계인끼리) 경쟁률이 높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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