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31화 잘 안 들려
검진을 받는 분이 검사 결과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평소에 별문제가 없어도 말이다. 그래서 굳이 불필요한 불안을 조성하기보다는 나도 그렇다거나 나보다 낫다는 말씀을 드리곤 한다. 그런데 한 쪽 귀가 거의 안 들리는 000(남82세) 님은 좀 더 강한 확신, 조언이 필요하셨던 것 같다. 허리를 쟀는데 얼마냐고 물으셔서 66센티, 26인치라고 답해 드렸다.
-허리가 가늘어요?
네에? 에헤 그게… 조금 마르신 것 같네요.
내가 비만, 과체중이라 마른 분을 보면 부럽기도 해서 드린 말씀인데 이 말이 걸리셨나? 평소에도 특히나 허리가 가는 게 속상하셨는지 잠시 뒤에 병리실에서 피를 뽑으며 이번에는 병리사 선생님을 붙잡고 물으셨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소?
네, 말씀하세요.
-내가 말이오. 배가 나오게 하려면, 허리가 굵어지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네?
-잘 먹으면 되겠소?
네에. 근데 이제는 (나이가 드셔서) 어려우실 거예요.
-뼈가 굵어져야 하겠소?
네에, 이젠 그게 잘 안 되실 거 같은데요.
-안 되겠소?
이제는 힘드시지 않을까요?
-늙어서 그렇소?
아무래도 세포가 새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잘 먹어도 안 되겠소?
그게… 잘 드시고 건강하셔야죠.
-잘 먹으면 되겠소?
네에, 그래도…
-허리가 굵어지겠소?
네네. 잘 드세요. 잘 드시면 될 거에요.
000 님은 귀가 잘 안 들리지만 듣고 싶은 대답은 듣고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