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74화 기억을 믿으시나요?
아니오, 별로 믿지 않아요.
그렇다. 나는 그다지 기억을 신뢰하지 않는다. 검진센터에서 일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다지’를 붙인 것도 세상에 100%란 없는 것 같아서 그런 건데 이런 생각도 언제부터 갖게 되었는지 역시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예전부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닌가 보다. 가끔 본인이 언제 검진을 했는지 알아봐 달라는 분이 계신다. 전에 검진하긴 했는데, 다시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언제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시는 거다. 기록이 남아 있으면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니다.
-이거 검진을 작년에 했는데 하라고 또 날라 왔어.
분변(잠혈검사)은 매년 나와요. 혹시 모르니까 봐 드릴게요. 잠시만요. (조회 중) … 에이, 작년에는 안 하셨는데.
-그런가?
여기서 마지막으로 하신 거는 16년 12월 00일이에요.
-하하. 아 생각났다. 그때도 사람이 많아서…
이 정도 착각은 흔하다.
-작년에 했다니까.
안 하셨다니깐.
-했다고.
(검진)기록이 없어요. 내과 진료도 안 보셨는데. 작년에 여기는 오신 적이 없어요.
- … …
건강보험공단에 조회하면 구체적인 내역은 몰라도 검진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있다. 최근 5년 사이의 검진 기록 조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를 말씀드리면 대부분은 수긍하신다. 물론 끝까지 우기시는 분도 있다.
수면내시경 보조를 할 때마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봐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다지 기억을 신뢰하지 않는다. 아마도 검진센터에서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아 참, 까먹기 힘든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세상엔 참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는 사실 같은 거? 잊을 만하면 일깨워주시는 분들이 잊지 않고 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