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22화 귀가 뻥 뚫렸다
부제: 자신을 안다는 것
목감기가 오래가고 있었다. 갑자기 고도가 바뀔 때처럼 오른쪽 귀가 먹먹했다. 이비인후과에 갔다. 콧물과 가래가 이관을 막은 걸 확인하고 3일 치 약을 처방 받았다. 다 먹었는데 낫지 않아 다시 5일 치를 받고 그마저 하루치가 남았는데 별 변화가 없어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런 상태로 일을 하는데 차트를 볼 필요도 없는, 내 머릿속에 진상으로 각인된 분이 오셨다. 이런 까다로운 손님은 차트에 우리만 아는 표시를 해둔다. 혹시나 당사자가 컴퓨터 화면을 보실 수도 있고 우리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므로. 아무튼 성함과 생년월일을 여쭈었고 잘 안 들려 한 번 더 묻고는 일단 들린 대로 대기자 명단에 후다닥 썼다. 보통 본인이 직접 쓴다. 그런데 내가 적은 걸 보시고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못 듣나? 이름도 틀렸네?
내가 잘 못 들은 것도 맞고 휘갈겨 쓴 탓도 있을 텐데 안 좋은 상태에 기분 나쁜 소리까지 들으니 가뜩이나 건조했던 감정이 가뭄의 논바닥처럼 갈라졌다. 욱하고 올라왔지만 상대가 듣는데도 대놓고 저런 말씀을 하시는 분에게 뭐라 해봐야 나만 손해라는 결말이 너무 뻔했다. 방사선 샘에게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날리고는 신경을 껐다.
남은 약을 다 먹고 항생제 용량을 높인 처방을 받은 이틀 뒤 이번엔 효과가 분명했다. 그만큼 기분도 나아졌고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업무에 들어갔는데… 예약하신 분이 오셔서 차트를 열어보니 ‘진상’표시가 볼드체다. 먼저 숨을 고르고 설명할 것은 하되 엮이지 않으려고 말을 아끼며 접수했다. 소변을 받아오시고 신체 계측을 하고 문진표 작성을 도왔다. 드시는 약도 가족력도 없고 담배 끊고 술도 안 하시고 운동량도 적절했다. 마지막으로 혈압도 정상이라 나도 모르게 “다 좋으시네요”가 튀어나왔다. 말 한마디에도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는 분들이다. 아차, 싶었다. 그런데…
-성격만 나쁘지, 다른 건 괜찮아요.
예?! 티는 내지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그 어렵다는 ‘너 자신을 알’고 계시다니. 사람을 안 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귀가 뻥 뚫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