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전 10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검진센터 안이 한가하다. 예약하신 분은 오지 않고 거기에 예약이 필요 없는 다른 검진을 받으러 오는 분도 유독 없는 날,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다. 좋게 말해 검진과 검진 사이에 여유가 생기는 날이다. 부인과에서 온 소변검사 컵을 병리실에 전하고 나오다가 문득 내시경검사실 쪽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거기엔 채혈을 마치고 진경제도 맞고 이제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000 님이 베드 위에 앉아계셨다. 조용하고 약간 어둑어둑한 내시경검사실 안에 별다른 표정 없이, 무심하게 검사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접수대로 돌아와 앉았다.
⑥ 암검진 <공통 문진표>에 대하여
암검진으로 위내시경을 하든 분변잠혈검사를 하든 항목과 상관없이 작성하는 공통된 문진표가 있다. 물론 이 문진표도 내용은 전국 어디나 똑같다. 당연히 암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26화 클립 유감
검진 업무에 태블릿을 이용하면서 근무 환경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낯설어 번거롭기도 했지만 열 달이 조금 넘은 지금은 ‘익숙’을 지나 ‘능숙’이 되었고, 효과는 선명하다. 관련 업무 시간과 소모품 사용이 줄어든 것이다.
검진 센터에서 하던 대부분의 업무가 종이로 대표되는 소모품들을 써가며 검진 정보를 기록하고 입력하는 ‘손’으로 이루어졌었다. 현재는 정보가 연동되니 한결 간편해졌다. 이렇게나 클립을 유용하게 많이 사용하고 있다(98화 별거 아닌데…)고 말했던 내게 원래 있던 그 자리에, 넉넉히 쌓여있는 클립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러다이트 운동이나 인공지능의 영향 같은 시대의 변화가 떠오를 정도로 말이다. 연말이 되어 클립을 담은 투병 플라스틱 상자의 바닥이 드러나면 불안했던 시절이, 그래봐야 일 년 전인데도 무척 오래된 기억 같은 이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쓸모가 변한다는 사실, 존재감이 줄어드는 존재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나의 쓸모는?’의 물음은 부담스럽다. 편리와 줄어든 업무 시간을 위안 삼아 클립을 보며 드는 잡생각을 떨치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쓸모가 줄어든 물건들이 줄줄이 보인다. 스테이플러, 수정 테이프, 딱풀, 제약사의 홍보 볼펜들, 결과 기록지, 문진표, 통보서 출력 용지, 발송 봉투….
그런데 그만큼 아낀 시간은 다 어디로 갔을까?
쓸모가 줄어든 물건들을 피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잿빛 하늘.
내일은 예보대로 맑으려나?